회고록

제5회 지적문예공모 수상작 / 내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 지적(地籍)

靑山 이완근 2020. 6. 30. 16:44

찰나같이 지나가는 세월 속에 나를 묻고 한잔의 술잔을 기울이다가 2005년도의 수상작 내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 지적(地籍)이라는 수필이 생각 나 스캔으로 떠 올려 본다.

 

 

 

 

 

제5회 지적문예공모 수상작 / 내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 지적(地籍)

 
나는 1·4 후퇴 때 황해도에서 피난 나오신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장남으로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457번지 두메산골 오두막집에서 1957년 음력 8월 20일 불행한 아이로 태어났다.

농사일을 해야만이 먹고 살아갈 수 있었기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실습을 나가기 전까지 잘 먹지도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농사일을 하고 나서 학교에 가고 또 학교가 끝난 즉시 일터로 달려가 몸이 부서져라 하고 일을 하다가 밤 12시가 다 되어야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곤 하는 처절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는 가운데 중학교 2학년 시절에는 신장병에 걸려 학교에도 몇 달 동안 가지 못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위장병까지 걸려 그때 당시 위장약을 사다 무척이나 많이 먹었다.

 
온몸이 붓고 숨이 차고 수박만 먹어도 소변이 누렇게 나오는 등 너무나 괴로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했기에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세월이 가면 나을 거라고 일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하면서 부모님은 계속 일을 시켰다.

인정사정도 없는 부모라고 원망도 해보고 세상을 한탄도 해보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고 오직 나 자신의 문제는 내가 스스로 이겨내고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렇게 혹독하게 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공부를 했다.

 
그 결과,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권에 들었고 3학년 2학기 때인 1975년 11월 7일 드디어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나의 운명을 바꿔줄 곳인 대한지적협회 무안군 출장소였던 것이다.

키는 작았지만 몸은 뚱뚱하면서도 눈이 부리부리한 소장님과 마음씨 좋은 선배님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고 지도도 잘해주었으며 착실하게 열심히 잘하면 실습이 끝나도 계속 근무를 하게 해 준다는 소장님의 말씀도 있었다. 

 
그래서 죽어라 하고 열심히 했다. 
 
그것은 행운이었으며 나의 운명을 바꿔줄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근무한 1977년 6월 20일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 8개월 동안 0 하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면서도 
야산 개발 측량, 경지정리지구 확정측량 등을 다녔던 일, 오지 출장 시 며칠씩 숙박을 하면서 일을 깔끔하게 끝냈던 일, 출장길에 오를 때 버스 타고 또 걸어서 다니면서 정담을 나누던 일, 선배님들이 짜장면 사줘서 맛있게 먹었던 일, 폴대를 들고 논두렁 밭두렁을 누볐던 일 등 수없이 많은 보람과 추억들이 뇌리를 스치고 한잔의 술잔을 들 때면 더욱더 향수에 젖곤 한다. 
 
이런 것이 인생인가 보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고생시켰던 신장병과 위장병이 돈하나 들이지 않고 동시에 말끔하게 나았다는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지적측량 업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한 마음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 본다. 
 
그래서 지적(地籍)과 나의 만남은 나의 운명을 360도 바꿔 놓은 숙명적인 만남이었다고 정의해 보고 싶다. 영국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참고 견뎌내면서 나름대로 노력했기에 지적(地籍)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보며 소장님과 선·후배님들의 도움으로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자랑스러운 지적인(地籍人)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나 생각을 해 본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지적협회에 근무했던 세월이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소관청에서 보다도 내 인생에 가장 어려운 시기인 지적협회에서 근무했던 기간이 짧지만 영원히 가슴속에 기억되는 순간들이었으므로 이 글을 통해서나마 그때 함께 근무했던 소장님과 선·후배 동료 여러분께 감사를 드려 본다.

그 후 1977년 6월 21일 자로 지적직 공채 시험에 합격해 소관청으로 발령을 받아 지금 현재까지도 지적인으로 근무를 해 오면서 지적협회에서 함께 근무했던 분들은 물론 다른 대행법인 동료들과도 유기적인 협조체재를 구축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업무를 추진해 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아무튼 나의 건강을 찾아주고, 지켜주고, 가난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행복까지 가져다준 사랑하는 지적(地籍)!

성공한 자의 과거는 처절할수록 아름답다고 했듯이 고생 많고 불행했던 학창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 준 지적(地籍)!

그 지적(地籍)을 나는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고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지적(地籍) 발전을 위해 힘쓰고 혁신하면서 전진할 것을 다짐해 본다.

끝으로 인생을 왜 사십니까라는 질문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가장 많은 답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는 1위가 건강, 2위가 사랑, 3위가 재산, 4위는 화목, 5위는 희망 또는 비전, 기타 장수·출세 등의 순이라고 한다.

이렇듯 우리 지적인 모두는 현장을 누비며 고된 업무를 수행하는 중 노동자이지만 자신의 건강도 챙길 줄 알고 모두를 사랑하면서 많지는 않지만 저축도 조금씩 하면서 화목한 분위기 속에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면서 승진도 하고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지적 발전에 다 함께 이바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