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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얘기

[백두산트레킹] 광개토대왕비, 왕릉, 장군총, 환도산성, 국내성 조망 및 관광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서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사후2년)이 세웠으며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 1.35미터 2미터 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겨진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으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개석 (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라고 한다.

고구려 특유의 호방한 필체로 쓴 비문은 현재까지 한,중,일 학자들에 의해 약 1500여자 정도가 해석되어져 있는데 내용은 크게 고구려 건국과정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수묘체계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따라 중국에서는'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불린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라는 뜻이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공원처럼 주변 경관이 잘 꾸며져 있다.

논란이 되는 비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신묘년 기사대목으로 완전 유실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며 나머지 글자도 학자에 따라 판독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글자가 섞여 있다.

 

일본은 1889년 <회여록>에서 "백잔 ,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 신라를 쳐 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였고,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사료를 살필때 "破"의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국내에서는 더욱 인정받고 있는 편이고, 아직까지 각종 학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광개토대왕의 초라한 비각과 능의 사진

 

 

광개토대왕비와 능이 있는 곳,

국과 쌍벽을 이루며 동북아의 패권을 다투던 고구려인들의 숨결이 서린 곳,

광개토대왕께서 장검의 시퍼런 날을 휘두리며 호령하시던 고구려 북방고토를 사진을 통해서 바라보니 하염 없이 눈물만 난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 솟는 이 눈물을 억제할 수 없다.

분하고 원통해서 그리고 억울해서 일까?

그 눈물이 나만의 눈물일까?

광개토대왕의 눈물인지도, 고구려인들의 피맺힌 눈물인지도 모른다.

왜 고구려가 망했을까?
왜 나당 연합군을 보기 좋게 격파하지 못했을까요?
김유신, 김춘주 두 분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영웅이라고 초등학교의 역사에서 배웠다.
그 분들이 과연 영웅 대접을 받아 마땅한 행위를 한 것일까요?
이러한 잘못된 역사인식에 대해서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왜 나당이 연합했을까?
왜삼국이 연합해서 당의 침략을 격파하지 못했을까?
왜 발해는 한 순간에 멸망했을까?
그 찬란했던 230 여년간 통치 중에 왜 고려와 연합해서 고구려의 북방고토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서 중원을 지배할 의지와 야망을 불태우지 못했을까?
왜 그러한 지혜와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없었을까?
최영장군과 공민왕의 명령을 받고 요동정벌을 떠난 조민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떠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가?
어떠한 방법으로도 정권만 유지하고(신라 삼국통일), 정권만 잡으면(이성계의 이씨조선건국, 이방원의 구테다, 박정희 5,16 구테타, 전두환, 노태우의 5,18의 폭거와 만행), 모든 것이 정돵화 되고, 영웅시 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이요, 가치판단인가?

이 모든 것도 역사의 왜곡이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도 바로 잡아야하지만, 우리의 역사의 왜국도 속히 바로 잡아야한다.

이성계 정권잡고 펼친 외교는 어떠했는가?
명나라의 허락을 받아서 권력찬달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그리고 그 굴욕적인 외교는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의 권력찬탈의 외교에도 그 대로 적용됐다.
해방 이후의 정국은 또한 어떠했는까?
북은 쏘련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나라를 세웠고, 남은 미국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각기 다른 이념의 국가를 세우고 그리고 6,25라는 전란을 통해서 이 나라는 초토화 되었고, 그리고 지금도 북은 중국에 절대적인 의존을, 남은 미국에 절대적인 의존을 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하는가? 

외국에 대해서는 설설기면서 국민들에게 폭력과 만행의 권력을 서슴 없이 행사했고, 우리들 힘 없는 민중들은 그 모진 박해를 당하고만 살았을까?

 

이차세계대전 이후 신탁, 찬탁을 주장하면서 거리를 행진했던 나라는 우리말고 또 있었다.
그의 수도가 빈인 오지리 이다.
그들은 좌파, 우파의 대립을 지양하고 좌우파의 연합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항였고, 지금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다. 좌파, 우파가 오순도순 잘 잘살고 있다.
왜 우리는 지금도 좌우파의 연합 혹은 중화(中和)의 슬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까?
이차세계대전 이후 통합하지 못하는 나라는 오직 우리 밖에 없다.
동, 서독이 통일을, 월맹과 월남이 통일을 이룩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못하고 있을까?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동서의 분열과 대립, 갈등은 왜 생겼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그 골은(gap) 왜 더욱 더 심화되고 있을까?
남북의 좌우의 이념대립의 망령이 이제는 종북주의, 종미주의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진보좌파니, 보수우파니 하는 새로운 옷을 갈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니, 오호라,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할까?
다들 대학을 나왔고, 다들 먹고 살만큼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폐허위에서 경제건설을 이룩했다.
세계 240여개의 국가 중에서 13번째의 부를 창출한, 9번째로 무역수출입총액 1조달라의 위업을 달성한, 9번째로(? )국민소득 2만달러와 총인구 5천만 시대를 창출한 위대한 국민이다.
우리는 그런대로 민주화도 이룩했고, 투표에 의한 정권교체도 이룩했다.
이승만 12년 독재정권도 타도한 위대한 국민이다. 끊임 없이 이어졌던 유신독재에 대한 항쟁이 그리고 마지막 부마항쟁의 불씨가 박정희 18년 5개월간의 독재정권을 타도한 계기가 되었으며, 5,18 광주항쟁, 전두환정권으로 하여금 직선제를 받아들이게 한 시민항쟁의(정확한 날짜 기억 못해서 죄송) 위대한 역사적인 기록들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국민이다.
불의와 독쟁에 항거, 항쟁했던 용감한, 살아 있는 국민이다.


이제 남북의 분단의 비극도, 동서의 분열과 대립과 갈등도, 종북이니, 종미니 하는 이념적, 사상적인 대립과 갈등도 극복해야할 때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진실한 것인가, 지금 우리가 위의 모든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통합하는 길이 무엇인가, 더구나 경제건설을 이룩했다고 하나 빈부의 극심한 차이, 소득의 편중으로 인한 부의 불평등, 그리고 어느 곳에도 정의와 진실이 살아 있지 않고, 어느 한 사람도 정직하지 않는 이 거짓된 세상을 바로 잡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리고 잘못된 것을 과감히 바로 잡을 때다.

국민 각자가 주인이다.
주인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지고 지금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성찰해서 행동에 옮길 때다.
모든 잘못된 책임을 어느 정권, 어떤 대통령, 어떤 정당, 어떤 지역에 떠넘기는, 그러한 사고 방식으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고, 숙연한 자세로 어제를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잘못된 모든 책임을 너에게 돌리지 말고 바로 내가 져야한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해야한다.

서로 용서하며, 서로 격려, 위로하면서 우리는 아픈 과거를 뒤로하고 찬란한 역사를 건설하기 이해서 다시 시작하고, 다시 힘찬 출발을 해야한다.

호남 사람이라고 해서, 영남사람이라고 해서 의견을 달리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자기 지역만, 자기 지역 사람만이 옳다고 우기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즉 학연, 지연, 혈연의 편협된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날 때다.
너는 좌파, 나는 우파, 너는 종북주의, 나는 종미주의, 식의 편 가르기에서 제발 벗어날 때다.
그래서 6,25를 보는 시각도, 천안함의 폭파에 대한 시각도,사 사건건 우리의 역사를 인식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편견을 버리고 통일된 해석을 할 때다.

국내에서도 통일된 해석을 도출하지 못한 역사해석을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가,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자가 합일된 해석을 도출해 낼 수 있을까?
 

이제 우리의 꿈과 희망은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진실과 정직이 살아 숨쉬는, 정의, 진실, 정직이 대접받고 지배하고 통치하고, 그리고 보상을 받는 사회와 국가를 건설해야할 때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도 최소화 해야하고, 도농간의 격차도 최소화 해야해서 도시와 농촌의 균형을 이룩해야할 때다.
우리의 통합된 힘은 만리장성을 넘을 수 있고, 미국도 능가할 수 있는 초일류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중국 13억인구는 중국의 힘이지만, 그 것은 곧 중국의 최대의 약점이다,
그들의 부정, 부패와 그리고 저임금과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중국의 절대다수의 빈곤층은 중국의 파괴와 분열을 촉진할 것이며,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할 시기가 도래하고, 중국의 사막화는 중국의 몰락을 촉진할 것이다.
티벹(물경 330만평방키로미터)과 위구르(?) 족의 독립은 조만간 가시화 될 것이다.

일본의 기고만장도 납짝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자기술이 일본의 소니를 압도하리라는 꿈도 꾸지 못했던 시대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해냈다.
세계의 석학들이 2025년 쯤에는 한국이 세계 5 내지 6위의 경제대국이 되리라는 예연을 한지는 이미 오래다.
일본은 이미 쇠퇴, 쇠락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미국은 어떠한가?
우리의 삼성전자가 세계 1위의 매상을 올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중국은 광활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다.

그러나 인류역사에 있어서 어느 제국도, 어느 왕국도 영원히 존재하지 못했다.

서로마제국이 5세기 반경에 몰락했고, 영원히 갈 것 같던 신성로마제국도 A.d 1543년에(?) 종말을 고했고, 그 아시아와 유럽의 양대룩에 걸쳐서 맹위를 떨쳤던 몽고제국도 한 방울의 이슬로 사라졌지 않는가?

이 역사의 법칙 앞에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 것은 역사의 필연의 법칙이다. 
이제 세계역사의 현장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일어서서 세계를 재패할 역사적인 시기가 도래했다.

우리는 일어날 시기며, 중국과 미국, 일본은 쇠태의 길을 걸을 시기다.

 

모든 것에 있어서 열세인(자원,기술,자본, 교육, 등) 대한민국이 이제 모든 면에 있어서 세계의 일류가 되어가고 있으며 기필코 우리는 세계 제1의 초일류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6,25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 위에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그리고 예언했던 사람은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무(無)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유(有)를, 부(富)를 창조한 위대한 국민이다.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서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없어서 우리의 누나, 형제들이 서독에서 광부로, 간호사로 번 돈이 담보되어 서독에서 빌릴 수 있었던 것이 우리의 지나온 고달픈 역사다.
자본도, 기술도 축적되어 있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이룩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
자본도 기술도 학식도 준비되지 않고, 전무했던 상황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우리가 무엇을 못할 것인가? 무엇을 못한단 말인가?

스포츠 강국의 위치에 올라섰다. 우리는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세계 5위의 위업을 달성했다.

한국 선수에 불리한 심판과 오심을 극복하고 이룩한 자랑스런 쾌거였다.

세계 5위의 위업을 이룩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일을 우리는 해냈지 않는가?!

스포츠에 기울였던 정성과 힘을 과학계에 퍼부어서 세계의 과학을 리드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하겠다.

세계최초의 인쇄술을 개발했던 창조력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을  창제했던 창의력이 우리의 혈관에 흐르고 있고,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거대한 중국과 맞서서 자웅을 겨뤘던(A.D 668년) 고구려국민의 용기와 패기가 우리의 심장에서 고동치고 있지 않는가?!

배 12척으로 왜선 400여척과 싸워서 이겼던 이순신과 그 휘하의 장졸들의 불굴의 의지와 용기가 우리의 가슴 속에서 이글거리고 타고 있지 않는가?!

 

이제 어떠한 것도 우리를 방해가 될 수 없고, 어떠한 적도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
우리 앞에 방해물과 적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분열과 대립의식이다.
먼 앞날을 보지 못한 편견과 자만이 부른 분열과 대립 의식이 우리의 역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통치했던 그리고 발해왕국이, 해동성국이 통치했던 그 광활한 북방고토를 다 잃고 이 협소한 공간에서 웅크리고 있는 처량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해서 제 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하겠다.

만리장성을 넘는,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초일류국가를 건설해햐겠다는 각성과 자신감을, 희망과 용기를, 패기를 가지고 오직 앞으로 전진만을 해야겠다.

 

수나라 100대군을 살수에서 수장시켰던 을지문덕 장군이 울렸던 북을 다시 울리자. 둥, 둥, 둥..

광개토대왕이 전진을 외치며 울렸던 북을 다시 울리자. 둥, 둥, 둥...

적진속에서 도망가는 왜군을 격멸하기 위해서 이순신 장군이 울렸던 북을 다시 울리자, 둥, 둥, 둥...
이제 출발하자.
다시 시작하자.
다시 박차고 일어서자.
우리 앞에는 어떠한 적도 없고, 우리 앞에는 어떠한 방해물도 없다.
오직 전진만이, 성공과 번영만이 있을 것이다.


 

 

 

 

 

 

 

 

 

 

 

 

 

 

 

 

 

 

 

 

 

 

 

 

 

 

 

 

 

 

 

 

 

 

 

 

 

 

 

 

 

 

 

 

 

 

 

 

 

 

 

 

 

 

 

 

 

 

 

 

 

 

 

 

 

 

 

 

 

 

 

 

 

 

 

 

 

 

 

 

 

 

 

 

 

 

 

 

 

 

 

 

 

 

 

 

 

 

 

 

 

 

 

 

 

 

 

 

 

 

 

 

 

 

 

 

 

 

 

 

 

 

 

 

 

 

 

 

 

 

 

 

 

 

 

 

 

 

 

 

 

 

 

 

 

 

 

 

 

 

 

 

 

 

 

 

 

 

 

 

 

 

 

 

 

 

 

 

 

 

 

 

 

 

 

 

 

 

 

 

 

 

 

 

 

 

 

 

 

 

 

 

 

 

 

 

 

 

 

 

 

 

 

 

 

 

 

 

 

 

 

 

 

 

 

 

 

 

 

 

 

 

 

 

 

 

 

 

 

 

 

 

 

 

 

 

 

 

 

 

 

 

 

 

 

 

 

 

 

 

 

 

 

 

 

 

 

 

 

 

 

 

 

 

 

 

 

 

 

 

 

 

 

 

 

 

 

 

 

 

 

 

 

 

 

 

 

 

 

 

 

장군총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集安縣] 용산(龍山:土口子山) 아래에 있는 고구려기단식 돌방돌무지무덤[基壇式石室積石塚]

 

 

정식 명칭은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이다. 무덤 앞으로는 퉁거우 평야[通溝平野]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압록강이 흐른다. 무덤은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4층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돌방[石室]을 설치했다.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졌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1.28m, 밑변 한 변의 길이는 29.34m, 밑면적 860㎡이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 무덤축조에 쓰인 석재의 부피는 총 6,000㎥에 이른다. 무덤의 기초부는 지면을 깊이 5m가량 파내고 자연석을 다져넣은 후, 그 위에 큰돌을 깔았는데 제1층 기단부의 바깥으로 4m가량 나오게 하여 무덤돌이 내리누르는 힘에 견딜 수 있게 했다.

 

무덤의 제1층은 4단으로, 2~7층은 모두 3단으로 장대석을 쌓았다. 이중 제1단에 쓰인 장대석 중 큰 것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0m에 이른다. 각층의 윗단 장대석 상면과 위층 하단 장대석 하면에는 서로 맞물리도록 7~8㎝ 너비의 요철부를 만들었다.

 

제1층의 각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높이 5m가량의 대형 석재로 버팀돌을 세워 무덤을 지탱하게 했는데, 북면의 1개는 깨어져 없어지고 현재는 11개만 남아 있다. 널길은 5층 남면의 하단 중앙에서 안으로 기울어 내려가게 제3층 상면을 바닥으로 하는 널방[玄室]과 이어진다.

 

널길의 길이는 5.5m이며 널길 입구에는 문지방과 같은 거대한 장대석을 가로놓아 제4층의 벽석 속으로 감추어지게 했다. 널방은 장대석을 6단으로 쌓아올려 정방형의 벽을 이루게 하고 그 위에 역계단식 평행줄임방식으로 들보 역할의 석재를 얹어 마무리한 다음 길이 4.5m, 너비 3.8m 크기의 판석을 덮어 축조했다.

 

천장돌의 넓이는 약 60㎡, 무게는 50t가량이다. 널방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5.0m, 높이 5.5m이다. 널방 안에는 동서로 나란히 2개의 널받침[棺臺]을 설치했다. 널받침은 길이 3.7m, 너비 1.5m이며 윗면 가장자리를 요철형으로 두드러지게 하여 관이 놓일 위치를 나타냈다. 널방 안에는 본래 석회를 발랐으나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무덤정상부에 놓인 돔형의 석재 상면 4변에는 21개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 주변에서 상당량의 와당편을 발견했다. 무덤의 남쪽 흙무더기에서 연꽃무늬 등이 장식된 와당편과 녹슨 쇠사슬이 여러 점 발견되었는데, 둥근 구멍은 쇠사슬로 난간을 설치했던 것이고, 와당과 기타 건축자재류로 보아 정상부에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되어 묘실 내에서는 일체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무덤 남쪽 밑의 흙더미에서 동제장식편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무덤둘레에는 잔자갈을 깔고 그 바깥에 돌담을 둘러 묘역을 구분했다. 돌담은 모두 무너져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묘역의 북편 50m 지점에는 동서로 나란히 5기의 배총(陪塚)이 마련되었으나 현재는 1기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배총은 기단부 3층과 묘실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향이다. 기단부의 길이는 9.2m, 높이는 1.9m이다. 묘실 네 벽과 천장은 각 1개씩의 대형판석으로 이루어졌다.

 

타원형에 가까운 천장돌 밑면 둘레에는 요철형의 돌기부를 만들어 빗물이 돌방 안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장군총에 쓰인 석재는 무덤의 서북 20㎞ 거리에 있는 양펀 현[陽分縣] 가오타이춘[高臺村] 상뤼수이차오[上緣水橋] 근처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 같다.

 

그 이유는 이 채석장의 석재가 결이 고운 화강암으로 장군총에 쓰인 돌과 재질이 같기 때문이다. 무덤의 거대한 규모, 5기에 이르는 배총, 무덤이 돌무지무덤의 최종단계형인 기단식돌방무덤인 점, 무덤 주변에 태왕릉(太王陵)과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등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무덤의 피장자를 412년에 죽은 광개토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국내성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이다.
고사에 "주몽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졸본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흘승골성과 같은 곳이다.
AD 3년(유리왕 22)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주 안둥성 지안과 그 배후의 산성을 포함한 지역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구려는 3~427년 국내성을 수도로 삼았다가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세번째 천도를 행하였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서울을 옮기기 전에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는 환도성과 국내성이 이름만 다른 동일 지역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국내성의 위치는 평북 의주라는 설도 있고, 또는 같은 도 초산군 북쪽 압록강 건너편 땅이라는 설도 있다.

오늘날 국내성 내의 고구려 건축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사라져 버렸지만..
우리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고구려 당시의 웅대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유적이..
단 한 곳 남아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국내성 성벽이다.
국내성 성벽은 고구려 성벽의 한 형식으로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그 축조수법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성벽들이 무너져 없어졌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국내성 성벽 유적은..
고구려식 성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중국 정부에서도 국내성을 성급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국내성은 네모꼴이지만 각 변의 길이는 서로 다르다.
1980년에 조사, 측정된데 의하면 동벽 554.7미터, 서벽 664.6미터, 남벽 751.5미터, 북벽 715.2미터로서 총 둘레가 2,686미터가 되는 꽤나 큰 평지성이다. 안팎은 모두 방형 또는 장방형의 가공된 돌로 쌓았다.
성벽은 거의 훼손되고 시내 중심가로 편입되어 버렸기 때문에 옛날의 국내성은 파악하기 어렵고..
기록에 나타나 있는 성벽의 흔적을 따라 돌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원래 성벽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雉)가 설치되기 마련인데..
1975년 시굴 당시 북쪽 성벽에 8개, 동·서·남쪽 성벽에 각각 2개씩 모두 14개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환도산성

<삼국사기>에 의하면 환도산성은 고구려 제 10대 산상왕(山上王.197~227년) 즉위 2년 (198)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같은 왕 재위 13년 (209년)에 천도한 후 서기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 까지 왕성(王城)으로 기능했다.

 

고구려의 도성의 경우 , 평상시에는 거주하다가  비상시에는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하는 평지성(平地城).산성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는데, 환도산성은 비상시에 피난하여 거쳐하는 곳으로,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시(集安市) 북쪽 2.5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지성인 국내성은 지린성 지안(集安)시 지역에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온 백성이 이곳 환도산성에서 전쟁을 치룬다. 뒷산이 말굽처럼 둘러 싸고 앞에는 깊은 강이 흐른다. 뒷산에는 오녀산성이 있어 산위로 침입하는 적을 막았기 때문에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산성이다.

 

국내성이 평성인 도성인 반면 환도산성은 유사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군사적 위성으로 '산성자산성' 혹은 '위나암산성'이라고도 불린다. 발말굽 모양의 불규칙한 타원형 형태의 돌로 쌓아올린 산성 입구에는 현재 석각으로 된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성은 일부 훼손됐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환도산성에는 현재 약 5m 높이의 북쪽 화강암 성벽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를 비롯해 병영터와 궁전터 흔적들이 일부 남아있다.

 

 

유리왕 21년 국내성으로 천도 후 반원형 산봉우리와 주위 능선을 이용해 만든 산성- 676m의 반원형 산봉우리와 주위 능선을 이용해 만든 총둘레 7km의 산성이다. 환도산성은 집안시 북쪽 통구강을 따라 약 2.5km 떨어진 환도성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장군총(장수왕릉)

 

소장/소재지 중국 지린성 지안현
시대 고구려시대
종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을 깔아 능역()을 표시하였다. 널방[]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이 있는 굴식[]이며, 2개의 널받침[]이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滿調)》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돌무지돌방무덤[]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중국측에서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으나 고분의 유품이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