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강변도로를 따라 식영정을 찾아가는데 무안 몽탄에 석정포가 나왔다. 자동차를 멈추고 잠깐 구경해 보았다. 몽탄(夢灘)은 글자 그대로 ‘꿈의 여울’이라는 뜻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고려 왕건과 연관된 전설에서 유래되었다는 일화, 즉 고려 왕건이 견훤과 금성(지금의 나주)을 두고 최후의 건곤일척(乾坤一擲·하늘과 땅을 걸고, 즉 운을 하늘에 맡기고 한번 던져 본다는 뜻인데, 중국 당(唐)나라 제일의 문장가 한유(韓愈)가 옛날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싸우던 홍구(鴻溝)라는 곳을 지나다 초(楚) ·한(漢)의 옛 일이 생각나서 지은 글인 <과홍구(過鴻溝)>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나오는 시 구절로 “용피호곤할천원 억만창생성명존 수권군왕회마수 진성일척도건곤(龍疲虎困割川原 億萬蒼生性命存 誰勸君王回馬首 眞成一擲賭乾坤·용은 지치고 범도 피곤하여 강과 들을 나누어 가졌다.
이로 인해 억만창생의 목숨이 살아남게 되었네. 누가 임금에게 권하여 말머리를 돌리게 하고, 참으로 한 번 던져 하늘과 땅을 걸게 만들었던고”)의 와중에 견훤의 인해전술에 말려 왕건의 군사들은 완전 포위상태가 되어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에 왕건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신령님께 기도를 드리며 밤을 지새우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이를 가련하게 여긴 몽탄강 수호신이 왕건의 꿈속에 나타나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속히 군사를 이끌고 빠져나가라’고 귀띔해 주었다.
이처럼 몽탄의 도움으로 강을 무사히 건넌 왕건은 견훤을 무찌르고 금성을 취함으로써 마침내 고려를 창건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왕건의 둘째 황후이자 2대 혜종의 모친인 장화황후가 이곳 몽탄오씨 오다련의 딸이다. 전설의 진위를 떠나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이 몽탄전투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또한 몽탄이라는 지명은 마주한 지역의 지역명이 동일한 경우이기도 하다. 즉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와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에 있는 나루터 이름이 모두 ‘몽탄포구’로 불렸던 것이다.
원래 동강면 옥정리에 있는 포구를 ‘상몽탄’, 몽강리 포구를 ‘하몽탄’으로 불렀다. 특히 ‘하몽탄’인 몽탄면은 원래 ‘박곡면’이었는데, 1939년 ‘몽탄면’으로 개명된 것이다.
이곳 몽탄은 영산내해, 즉 남해만에서 내륙으로 접어드는 목으로, 물살이 세찬 곳으로 큰 여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근’은 ‘굼’, ‘꿈’으로 변하고 한자로 표기하면서 몽탄이 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처럼 몽탄은 영산강 가장 안쪽의 어항으로, 하구둑 축조 전까지 수많은 어선이 조수를 타고 어업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동강면 주민들이 명산역을 이용했으므로 1986년까지 동력선 나룻배가 운행됐는데, 하루에 500여명이 이용했던 대형 포구였다.
1994년 길이 680m의 몽탄대교의 준공으로 인해 나루 기능은 사라지고 고기잡이배 몇 척, 그리고 민물장어-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명산장어-식당 몇 집만 남아 옛날 정취를 유지하고 있다.
무안군 몽강리 망을 석정포구에서 몽탄을 거쳐 일로읍 청호리 주룡나루까지 몽탄강 권역은 사실상 영산강 뱃길의 시작이자 종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몽강리 석정포는 몽탄에서 생산된 각종 분청사기와 옹기 등을 운송했던 나루터였고, 하구언과 주룡나루 몽탄과 석정포를 거쳐 영산포구에 이르는 뱃길을 밝히기 위해 세워진 ‘멍수등대’는 1934년에 세워질 만큼 바다와 강이 한 몸으로 섞이며 물산를 생산해 내고 교통했던, 영산강의 영화를 주도했던 역사적인 포구이기도 하다.
특히 무안군 몽탄, 일로지역은 고령토와 황토 등 원료와 땔감이 풍부하고 영산강 뱃길이 편리해 삼국시대부터 옹기와 질그릇뿐만 아니라 백자와 분청사기 등을 만들어 오던 도요지가 성행하던 곳이다. 특히 300년 전부터 김장독과 물항아리 등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질그릇을 생산해 오던 곳이기도 하다.
1960년대에는 몽강리 마을 앞 영산강 석정포에서 돛단배에 옹기를 싣고 전국 각지로 나서던 장사꾼을 볼 수 있었으며, 마을 주민과 집방살이 등 90여가구가 4개의 대형 가마와 7개의 공방을 운영하며 옹기를 제작해 왔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김장독과 간장항아리, 물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의 질그릇이 만들어졌으며, 인근 목포의 향토기업인 삼학소주의 소주독을 제작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70년대 말 생활패턴의 변화로 옹기 수요가 급감하면서 80년대 말부터 마을 주민 대부분이 농업으로 전업하면서 옹기제작도 서서히 하락세를 맞았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 당시 피난 와 50년 넘게 몽강리에 터를 잡고 옹기를 제작해 오던 홍영수씨가 세상을 떠난 후로,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해 오던 아들 순탁씨마저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서 몽탄 옹기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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