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 2024. 9. 10(화). 06:00~
■동행자: 목포다솜산악회
■산행코스: 좌촌마을주차장~3코스~여항산~1코스~좌촌마을주차장(원점회귀)
■산행거리/소요시간: 4·7km/3시간 30분(휴식시간 1시간 15분 포함)
■산행지 개요
● 여항산[餘航山]
높이는 770m이다. 1583년(선조 16) 정구(鄭逑)가 함주도호부사로 이곳에 부임하여 이 산에 여항(艅航)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함안의 지형이 남고북저하여 나라를 배반할 기운이 있다고 풀이되어서 '배가 다니는 낮은 곳'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남쪽에 위치한 이 산에 지어준 것이다.
이곳에서는 각데미산, 혹은 곽데미산으로도 부르는데, 이는 정상 부근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6·25 전쟁 당시 미군들이 전투에 지쳐 '갓뎀'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계곡의 맑은 물과 산허리를 감싸는 운무, 산중턱의 원효암과 칠성각, 의상대, 서리봉, 피바위 등으로 유명하며, 6·25 전쟁 때는 낙동강방어선으로 격전을 치른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20~30명이 앉을 수 있는 넓고 큰 마당바위(곽바위)가 있으며, 마당바위에서 남쪽에는 상여바위, 북쪽으로 조금 지나면 배넘기 도랑이 나오는데 노아의 홍수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 여항산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에 있는 산.
[명칭 유래]
여항산(艅航山)이라는 지명은 1588년(선조 16) 함주 도호부로 부임한 한강정구(鄭逑)[1543~1620]가 여항산의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반역의 기가 있으므로 남쪽을 ‘낮아서 배가 넘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배이름 여(艅)', '배 항(航)' 자를 써서 여항산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해 전해지는 옛이야기로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물이 산꼭대기까지 차올라 정상에 각[곽] 하나를 놓을 자리만큼만 남았다는 데서 각데미산[곽데미산]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사수를 위해 여항산을 중심으로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데 이때 많은 피해를 입은 미군들에 의해 ‘갓뎀(goddam)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는 ‘갓데미산’의 발음을 들어 희화(戱化)하여 부른 것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자연환경]
여항산[770m]은 예부터 함안의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으로, 지리산영신봉에서 김해분성산을 잇는 낙남정맥(洛南正脈)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함안면 강명리 일원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일원에 분포한다. 함안의 지형적 특성인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세와 하천의 역류(逆流)는 바로 함안의 남단에 위치한 여항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20~30명이 앉을 수 있는 넓고 큰 마당바위[각바위]가 있으며, 마당바위에서 남쪽으로 상여 바위, 북쪽으로 조금 지나면 배넘기 도랑이 나오는데 '노아의 홍수'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정상의 각바위[곽바위 또는 갓바위]를 비롯하여 통일 신라 시대 초기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수도하였다고 전해오는 의상대와 서릿발같이 생겼다는 서리봉, 북쪽 산중턱의 원효암과 술이 빚어지지 않는다는 약수(藥水)와 바위색이 붉어 피바위라 불리는 절벽이 유명하다. 여항산은 명산답게 울창한 숲과 계곡마다 맑은 물이 흘러가는 곳곳이 절경으로 꼽힌다.
[현황]
여항산 북쪽의 함안군은 남고북저의 지형이라 하천이 북류하여 거꾸로 흐르는 듯하다. 여항산은 특히 계곡의 맑은 물과 산허리를 감싸는 운무, 산중턱의 원효암과 칠성각, 의상대, 서리봉, 피바위 등으로 유명하며, 6·25 전쟁 때는 낙동강 방어선으로 격전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좌촌에서 여항산으로 오르는 길은 모두 4개 코스로, 어느 길이든 당일로 충분하다. 제1코스는 주서리 좌촌에서 정상에 올라 다시 좌촌으로 내려오는 길로 2시간 정도 걸리고, 제2코스는 좌촌으로 정상에 올라 서북산을 타고 갈밭골로 내려오는 길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제3코스는 좌촌으로 정상에 올라 미산을 타고 내려오는 길로 3시간 정도, 제4코스는 미산을 타고 정상에 올라 서북산으로 해서 갈밭골로 내려오는 길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여항산은 연중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으로, 정상에서는 쾌청한 날이면 멀리 지리산까지 조망이 가능하며 남해의 푸른 물결이 내려다보인다. 대중교통편은 가야읍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좌촌행 완행 버스를 타고 좌촌에서 내린다. 여항산의 문화 유적으로는 여항산성(艅航山城)이 있는데 여항산성과 관련한 옛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항산성은 여항산 제1봉과 제2봉에 각각 축성되어 있으며 남북쪽으로 750m의 '여항산성Ⅰ', 북서쪽으로 700m의 '여항산성Ⅱ'가 위치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그림같은 풍광 펼쳐지는 낙남정맥 최고봉
여항산(艅航山)은 낙남정맥 상에 있는 산 중 최고봉으로 꼽힌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출발한 정맥이 삼신봉을 거쳐 창원 무학산, 김해 신어산에 이를 때까지 솟아 있는 산 중 최고봉이라는 뜻이다.
실제 정병산이 566m, 무학산이 762m인데 반해 여항산은 770m이다.
여항산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의 최북단에 있는 산으로 함안군과 경계를 이룬다. 생김새에 따라 요강산, 각데미산으로 불린다.
창원시가 알리는 명칭의 유래에는 ‘1588년 함주 도호부로 온 정구(鄭逑)가 여항산의 지형은 지리적으로 반역의 기가 있어 남쪽이 낮아서 배가 넘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배 여(艅), 배 항(航) 자를 써 여항산이라 붙인 것이라고 소개해놓고 있다.
곽데미산은 천지개벽 시 정상에 각(곽) 하나 놓을 자리만큼 남았다는데서 유래한다고 이 곽데미가 갓뎀산으로 바뀐 사연은 6·25 전쟁 때로 추정된다.
지역주민들에게 곽데미산이라고 들은 미군들이 주인이 수 십 차례 바뀌는 전투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갓뎀(goddam·제기럴)으로 희화화(戱畵化)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여항산의 지명유래
여항산(艅航山, 770m)은 예부터 함안의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으로, 지리산 영신봉에서 김해 분성산을 잇는 낙남정맥(洛南正脈)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강명리 일원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일원에 분포한다.
함안의 지형적 특성인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세와 하천의 역류(逆流)는 바로 함안의 남단에 위치한 여항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항산에 관한 기록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1530), 『함주지(咸州誌)』(1587), 『영남읍지(嶺南邑誌)』(1871) 등 다수의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중 『함주지』산천조(山川條)의 기록이 백아홉 글자로 비교적 상세한데, 「(요약) 군성(郡城:함안읍성)에서 서남쪽으로 15리(上里)에 위치하며, 두류(頭流:현재의 지리산)에서 300리를 이어져 와 군을 진압하는 진산이다.
산꼭대기 바위는 깎아지른 듯하고 남쪽은 낙숫물을 받는 댓돌처럼 생겼는데 그 위가 편평하여 10여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이다.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대마도의 여러 섬들이 뚜렷하게 보이고, 산허리에는 한낮에도 신령한 퉁소 소리가 나는 듯하며 구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가뭄이 심할 때에는 군민들이 기우(祈雨)의 깃발을 꽂고 비가 올 것인지 점을 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항’이라는 지명의 유래와 관련한 전설로는 천지사방이 물에 다 잠겼을 때 여항산의 꼭대기만이 배만큼 남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한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록에 ‘남을 여(餘)’자에 ‘배 항(航)’자의 ‘餘航’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586년 한강(寒岡) 정구(鄭逑) 군수가 부임하면서 함안이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으로 물이 역류(逆流)하는 까닭에 역모를 꾀할 기운이 있다 하여 이를 풍수지리적으로 바로 잡고자 낮은 북쪽은 뜻과 글자로써 높여 대산(代山)으로, 높은 남쪽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낮은 곳이라는 의미에서 여항(餘航)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지만, 대산과 여항은 이미 사용해 오던 지명으로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배이름 여(艅) 자에 배 항(航) 자의 ‘艅航’은 문헌기록과 각종 지도로 보아 18~19세기 사이에 ‘餘→艅’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여항산은 이외에도 마을주민들에 의해 곽(갓)데미산, 배넘기산, 필봉(筆鋒)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왔는데, 이 중 ‘곽(갓)데미산’은 정상에 있는 마당바위(平岩, 곽바위)를 가리키는 ‘곽(槨, 郭)’이나 ‘갓(冠)’에 큰 덩어리를 의미하는 순우리말 더미(데미)가 붙어 만들어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또 ‘갓’을 ‘어미’로, ‘데미’를 ‘산’으로 보아 ‘어미산’ 또는 ‘모산(母山)’의 의미를 가진다는 의견도 있다.
‘배넘기산’은 『함주지』총담조(叢談條) 천하의 지세(天下之地勢)에 「여항산의 ‘여(餘)’자는 방언에 ‘월(越)’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배(航)가 넘는다(越)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겠다.
한편, 6.25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사수를 위해 여항산을 중심으로 피아간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데 이때 많은 피해를 입은 미군들에 의해 ‘갓뎀(goddam)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갓데미산’의 발음을 들어 희화(戱化)하여 부른 것이다.
● 여항산의 문화유적
• 여항산성(艅航山城)
여항산성과 관련한 옛 기록은 전혀 없으며, 지방의 지리적 특색을 비교적 잘 기록하였던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조차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96년 5월 아라가야향토사연구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여항산성의 존재가 알려졌으나, 아직까지 정식의 학술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산성의 축성연대와 구조 등에 관한 정확한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여항산성은 여항산 제1봉과 제2봉에 각각 축성되어 있는 2개의 테뫼식(봉우리를 둘러쌓아 축성하는 방식)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해발이 높아 주변 일대를 조망하기에 특히 유리하고 남쪽의 진동만에서 함안으로 북진하는 적들에 대한 효율적인 관망과 방어가 유리하다는 점에서 군사적 기능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항산성Ⅰ’은 여항산 제1봉(770m)의 정상부와 능선에 남북으로 길게 축성되어 있는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약 750m 정도이다.
1996년 지표조사 당시에는 산성의 동문지(東門址)와 북문지(北門址)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으며, 특히 동쪽 성벽 일부는 비교적 잘 잔존해 있어 여항산성이 협축식(夾築式:내 ․ 외벽을 각각 수직으로 쌓아 올리면서 그 안을 흙이나 돌로 채우는 축성방식)의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훼손으로 인해 그 흔적을 쉽게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인데, 다만 산성의 북동쪽 능선을 따라 회곽도(廻郭道:성곽 내에 이동을 쉽게 할 목적으로 만든 길)로 추정되는 길이 약 150m, 너비 4~5m 정도의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어 이곳이 산성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경사면이 급한 서쪽과 남쪽은 별도의 축성 없이 암반을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산성 내에는 저수시설(貯水施設)로 추정되는 구덩이도 확인된다.
성내에 위치한 헬기장 주변에서 토기 편과 기와 편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산성과 관련한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항산성Ⅱ’는 여항산의 제2봉(744m) 즉 정상으로부터 약 700m 정도 북서쪽에 위치한 산성으로, 전체둘레는 약 270m 정도이다. ‘여항산성Ⅰ’과 마찬가지로 정상부와 능선에 축성하였다.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원형을 알기 어려우나 무너진 성벽의 부재(部財)들이 동서사면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 산성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 정상의 북동쪽 사면에서 산성의 일부로 추정되는 석축이 확인되며, 산성 내에는 저수시설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확인된다.
여항산성과 관련한 문헌기록이 전혀 없어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지표조사 당시 채집된 도질토기 파편과 선문계(線文系)의 기와 편으로 보아 삼국시대 말~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 여항단(餘航壇)
함안에 심한 가뭄이 들면 여항산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는 옛 기록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1)에는 여항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미산봉(眉山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사단(祠壇)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함주지(咸州誌)』(1587)에는 여항산의 정상에 있는 소위 마당바위에서 기우제의 깃발을 꽂고 비오기를 기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함주지』단묘조(壇廟條)에 선조(宣祖) 정해년(丁亥年, 1587) 여름 오랜 가뭄으로 농사가 많이 상하여 여항산에 석단(石壇 : 餘航檀)을 쌓아 놓고 비니 영험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1891)에는 1891년 4월 경, 각각 여항산 상봉(上峰)과 용연(龍淵), 별단(別壇)에서 십 수차례의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환여승람(還輿勝覽)(1929)에는 여항산에 기우단(祈雨壇)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여항산의 정상에 기우단이 있었다는 기록, 미산봉에 기우단이 있었다는 기록, 또 이외에 용연이나 별단 등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로 보아 여항산에 있는 특정의 여항단(餘航壇)에서만이 아니라 여항산과 그 주변을 포함한 수개의 장소에서 기우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현재 여항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m 정도의 위치에 등산객들에 의해 만들어진 십 수개의 돌탑이 있으며, 그 아래에서 약간의 석축(石築)이 확인된다.
1996년 아라가야향토사연구회의 지표조사 당시에는 이곳에서 가로 13m, 세로 9m 정도 규모의 타원형 석단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 역시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일 가능성이 높으나, 여러 문헌기록에서 전하는 여항단의 위치와는 차이가 있다.
● 명품자연생태숲길 ‘여항산 둘레길’
어느 듯 여름더위가 물러나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가을이 우리들 곁으로 왔다. 활동하기 좋은 계절에 마음과 몸을 치유할 수 있는 명품자연생태 숲길인 여항산 둘레길을 한번 걸어보자.
여항산(艅航山, 770m)은 예부터 함안의 주산이자 진산으로 지리산 영신봉에서 김해 분성산을 잇는 낙남정맥(洛南正脈)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강명리 일원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일원에 분포한다. 함안의 지형적 특성인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세와 하천의 역류는 바로 함안의 남단에 위치한 여항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항’이라는 지명의 유래와 관련한 전설로는 천지사방이 물에 다 잠겼을 때 여항산의 꼭대기만이 배 만큼 남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마을주민들에 의한 곽(갓)데미산, 배넘기산, 필봉 등 여러 이름을 불리어 왔는데 이 중 ‘곽(갓)데미산’은 정상에 있는 마당바위를 가리키는 ‘곽’이나 ‘갓’에 큰 덩어리를 의미하는 순우리말 더미(데미)가 붙어 만들어진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또 ‘갓’을 ‘어미’로, ‘데미’를 ‘산’으로 보아 ‘어미산’ 또는 ‘모산’의 의미를 가진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6.25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사수를 위해 여항산을 중심으로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데 이때 많은 피해를 입은 미군들에 의해 ‘갓뎀(goddam)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함안의 진산, 구구절절 사연도 많은 여항산을 등산코스가 아닌 가볍게 걸어 볼 수 있는 둘레길을 한번 찾아가 보자. 2012년 7월에 조성된 여항산 둘레길은 기존의 샛길과 임도를 연결하고 다듬어서 여항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으면서 자연경관과 생태를 배우고,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한 자연생태 산책로이다.
전체 구간이 14km로 총 4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구간은 단풍길로 7.7km, 2구간은 소나무 숲길로 3.2km, 3구간은 별내길로 1km, 4구간은 치유의 숲길 2.1km로 이루어져 있다. 소요시간은 대략 5시간 30분이 걸린다. 봉성저수지를 시작해서 서북산, 여항산을 거쳐 좌촌마을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여항면 주서리 좌촌마을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면 숲길체험지도사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숲길체험지도사의 둘레길 설명과 주의사항을 듣고 출발하면 된다. 단, 숲길체험지도사는 평일 9시부터 6시까지 근무하니 주말에는 볼 수가 없다. 1구간 시작은 좌촌주차장에서 봉성저수지 쪽으로 다시 내려와야 된다. 봉성저수지까지 내려오면 봉성저수지 탐방로가 나온다. 여유가 된다면 탐방로도 걸어보기 바란다. 봉성저수지 끝자락에 둘레길 입구라는 이정표와 1구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1구간은 단풍길이라 이름 지어진 것처럼 임도를 따라 단풍이 심어져 있다. 7.7km의 임도길로 좌촌에서 시작되어 감재고개 입구까지 이어진다. 평탄한 임도길을 걷다 보면 힐링한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전체 코스의 반이상을 차지하니 지루한 감은 있지만 길 주변으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봉성저수지를 볼 수 있는 조망데크와 쉴 수 있는 의자들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비가 많이 왔을 경우에는 계곡의 물소리와 폭포도 만날 수 있다. 1구간은 단풍길 이름답게 가을에 꼭 가보기를 추천한다.
2구간은 3.2km 소나무숲길로 임도가 끝나고 오솔길이 시작된다. 감재고개 입구에서 상별내까지 이어지는 코스로 소나무 솔향기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2구간을 가다 보면 약수터산장이 있다. 5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는 구간이다 보니 점심은 꼭 챙겨서 와야 된다. 하지만 점심을 챙기지 못했다면 약수터산장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도 좋다. 오리와 염소, 닭 요리가 있으니 트래킹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다. 2구간에는 평상과 의자, 법륜사와 계곡이 있으니 잠시 쉬어서 천천히 걸어보자.
3구간은 1km 별내길이다. 상별내에서 사방댐 입구까지로 비교적 짧으나 등산체험을 할 수 있는 구간이다. 가파른 구간으로 산고개를 넘어서 내려오면 사방댐 입구 임도길로 이어진다. 짧으면서 힘든 구간이 3구간이다. 임도길에는 조망대가 있어 여항산 정상과 봉성저수지를 함께 볼 수 있다. 1구간의 조망대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4구간 2.1km 치유의 길로 사방대 입구에서부터 좌촌 주차장까지 이어진다. 마지막 구간으로 사방댐을 접하고 있어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비교적 짧지만 편백숲과 황톳길이 있다. 편백나무의 피톤치드로 삼림욕을 하면서 황토를 밟아 보는 구간으로 맨발로 한번 걸어보자. 몸도 마음도 가볍게 치유될 것이다. 좌촌 주차장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오면 서북산 전적비 안내문이 보인다. 6.25 전쟁을 아픔을 되새기며 희생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바로 옆에는 380년 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다. 긴 둘레길 여정을 끝마친 힘든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여항산 둘레길 완주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둘레길 치고는 등산로가 있고 가파른 지형도 있어 등산화를 꼭 착용하시기 바란다. 어린이들과 같이 동반하는 트레킹이라면 완주보다는 4구간이나 1구간을 추천한다. 완만하고 볼거리가 많은 구간으로 어린이들이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최적의 구간이다. 구간별로 등산로와 이어져 있고 마을로 내려오는 길도 연결되어 있다. 힘들다고 생각된다면 마을로 내려오면 된다. 둘레길에는 곳곳에 이정표가 있다. 길을 못 찾을 곳에 도착하면 앙증맞은 이정표가 꼭 있다. 이정표대로 둘레길을 안전하게 걸어보시기 바란다.
한두 번 발길이 스쳐간 후 기억 속에 지워지는 길이 아닌 길에서 만나는 사람끼리 또한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어 치유될 수 있는 둘레길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숨은 곳곳의 보물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수많은 야생화와 작은 다람쥐도 만날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보물창고다.
길 따라 햇볕이 있고, 바람이 있고, 사람이 있고, 자연이 있는 곳, 그곳 여항산 둘레길로 한번 떠나보자.
■ 산행후기
○ 2015. 4. 12 낙남정맥 6구간 산행 때 가보고 이번이 2번째 산행
○ 3코스로 올랐는데 등산로 상태는 비교적 좋지 못하였으며 오르는 동안에는 조망이 전혀 없었음
○ 등로상태가 안좋은 곳은 신발 신고가고 등로가 좋은 곳은 맨발로 산행
○ 날씨가 무더워 땀이 주르륵
○ 헬기장에서 점심식사
○ 정상에서 조망은 굿
○ 하산은 1코스로 하였으며 조망이 전혀 없었음
○ 집으로 오면서 강진 설성식당에서 백반으로 저녁식사하며 약주도 한잔
○ 장거리산행이어 피곤하였지만 10년만에 다시 가봤다는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고 역시 위대한 여정이었음
○ 앞으로도 내가 가는 그 길이 어디쯤일지 모르지만 하루 하루를 멋지게 살고 싶음
■ 등산지도
■ 산행기록
■ 산행사진
🌹 늙어가는 길 (즐거운 노년을 위하여~♬) 🌹
늙어가는 길은
누구나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 두리번 찾아 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 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 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걸어가고 쉽습니다.
- 윤석구 늙어가는 길 中
🌅 "재주와 德"
재주가 德을 이겨서는 안됩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너 나 할것 없이 자식을 천재로 키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천재가 아니라 德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지도자의 위치에서 사회를 이끄는 사람은 천재가 아니라 德이 높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천재를 부러워 하지만, 천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德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 키우기 전에, 德을 좋아하고 德을 즐겨 베풀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할 것입니다.
공자는 天才不用이라하여 德없이 머리만 좋은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공자와 황택(皇澤)의 일화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느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길을 가는데 어떤 아이가 흙으로 성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레가 가까이 가도 아이는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얘야,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겠느냐?"
그런데도 아이는 쭈그리고 앉아 하던 놀이를 계속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레가 지나가도록 성이 비켜야 합니까? 아니면 수레가 성을 비켜 지나가야 합니까?"
아이의 말에 공자는 똑똑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수레를 돌려 지나가면서,
아이에게 이름과 나이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름은 황택이며, 나이는 8살이라 했습니다.
공자는 바둑을 좋아 하느냐고 아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주가 바둑을 좋아하면 신하가 한가롭고, 선비가 바둑을 좋아하면 학문을 닦지 않고, 농사꾼이 바둑을 좋아하면 농사일을 못하니 먹을 것이 풍요롭지 못하게 되거늘, 어찌 그런 바둑을 좋아 하겠습니까?"
아이의 대답에 놀란 공자는 한 가지 더 물어도 되겠냐고 하고는,
"자식을 못 낳는 아비는 누구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허수아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연기가 나지 않는 불은 무엇이냐?"
"반디불입니다."
그러면 "고기가 없는 물은 무엇이냐?"
"눈물 입니다"
아이의 거침없는 대답에 놀란 공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아이가 벌떡 일어서며 "제가 한 말씀 여쭤도 되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공자가 그렇게 하라고 이르자, 아이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에 모든 나무의 잎들이 말라 버렸는데 어찌 소나무만 잎이 푸릅니까?"
공자는 잠시 생각 하다가 "속이 꽉 차서 그럴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속이 텅 빈 저 대나무는 어찌하여 겨울에도 푸릅니까?"
그러자 공자는 "그런 사소한 것 말고 큰 것을 물어 보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하늘에 별이 모두 몇 개 입니까?"
"그건 너무 크구나"
"그럼 땅 위의 사람은 모두 몇 명입니까?"
"그것도 너무 크구나"
"그럼 눈위의 눈썹은 모두 몇개 입니까?"
아이의 질문에 공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공자는 아이가 참 똑똑하다고 생각하여 아이를 가르쳐 제자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아이가 머리는 좋으나 德이 부족해 궁극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 봤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수레에 올라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실제로 황택의 이름은 그 이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천재성은 천재성에서 끝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머리로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머리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보다 '가슴'이 미치는 영향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휠씬 큽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앞서 德을 쌓고, 德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 입니다.
당신은 德이 있으신가요?
德이 없고 재주만 있다면, 곧 끝이 보이게 될겁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德을 키우세요. (옮겨온 글)
🌹덕목과 생의 목표🌹
❤️💙💜🧡💚
좋은 사람은 외롭지 않고 어진 사람은 항상 즐겁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남을 도우면 자기 자신도 이롭게 되어 변함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토끼를 잡을 땐 귀를 잡아야 하고,
닭을 잡을 땐 날개를 잡아야 하고,
고양이를 잡을 땐 목덜미를 잡으면 되지만,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멱살을 잡으면 싸움이 되고 손을 잡으면 뿌리칩니다.그럼 어디를요?
마음을 잡으십시요.
마음을 잡으면 평생 떠나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잡도록 노력합시다.
배려하는 마음과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은 내곁에 늘 변함없는 친구가 있다는 것,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오가는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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