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마리의 학, 섬이 되다...
세마리의 학이 고이 잠든 푸른바다의 속삭임...
전설의 삼학도야!
옛날 옛적 유달산에 한 젊은 장수가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그 늠름한 기개에 반해 마을의 세 처녀가 수시로 드나들어서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젊은 무사는 세 처녀를 불러 "나 역시 그대들을 사랑하나, 공부에 방해가 되니 공부가 끝날 때까지 이 곳을 떠나 다른 섬에서 기다려 주오"하고 청했는데, 그 말대로 가서 기다리던 세 처녀는 무사를 기다리다 그리움에 사무쳐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었으나 세 마리 학으로 환생해서 유달산 주위를 돌며 구슬피 울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모르는 무사는 무예 수련중 세마리 학을 향해 활을 쏘아 명중시켰고 세마리의 학은 모두 유달산 앞바다에 떨어져 죽게 되었다. 그 후 학이 떨어진 자리에 세 개 의 섬이 솟으니 사람들은 그 섬을 세 마리 학의 섬이란 뜻의 '삼학도'라 부르게 되었다.
돌아온 삼학도야!
삼학도가 1895년 일본인에게 불법으로 판매된 사건이 있었다. (삼학도는 국유지임) 일본인 삽곡용랑은 개항 2년 전인 1897년 목포관리 김득추를 이용해 삼학도를 매입하였는데 개항 후 이 사실이 밝혀져 관련자를 처벌하고 다시 환수하였다.
이 사건은 '삼학도 토지암매사건'으로 일본인이 목포 토지를 침탈한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결국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삼학도와 고하도는 일본인 땅이 되고 말았고 이때부터 삼학도가 채석강이 되어 훼손되기 시작했다. 광복 (1945년)이 되서야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사공의 뱃노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시며 한국미술의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고 수화 김환기(1913~74) 화백은 내 모교 ‘안좌 초등학교’를 졸업하신 내 고향 대 선배님이시고 우리 아버지의 벗이었으며, 더구나 지금은 고인이 된 내 절친한 친구의 4촌 형님이 되기도 했던 분이시다.
수화 김화백이 1963년 3월에 쓴 글에서 고향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 고향은 전남 기좌도(지금의 신안군 안좌면), 고향 우리 집 문간에서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목포항에서 100마력 똑딱선을 타고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서 두 시간이면 닿는 섬이다.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
수화는 일제강점기 때 ‘안좌 공립 보통학교(안좌초등학교 전신)’을 졸업하신 후 고향을 떠나셨다. 이 글은 그 시절 고향을 배경으로 향수에 젖어서 쓰신 글이 아니었을까?
일제강점기시절 대륙침략을 감행하기 위한 전쟁물자 보급로로, 그리고 조선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기타 수탈한 물품을 수송하기 위한 수단으로 육지의 교통로는 철도가 부설되었고, 아울러 기존 소달구지나 겨우 지나다니던 좁은 농로를 확장해, 군용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서 만든 도로를 ‘신작로’라 불렀다. 따라서 기차와 자동차가 육지의 운송수단이 되었지만, 섬 지방과 육지를 잇는 교통수단은 오직 여객선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고향은 그런 혜택도 받지 못했으리라 짐작 한다.
내 어린 시절 고향에서 ‘신작로’라 부르던 길은 ‘마진리’에서 ‘남강리’까지 뚫린 도로였는데, 아마 그 신작로는 일제가 우리고향 농산물을 강제로 공출해 가져가기위한 통로로 이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섬 지방의 승객과 화물을 육지로 실어 나르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목재가 재료인 목선(풍선)뿐이었다.
소화물이나 승객들을 운송하는 똑딱선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지만, 그 시절 동력선 대부분은 고기잡이 배였거나, 큰 어선이 먼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면 그 고기를 육지로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목포항에서 100마력 똑딱선으로 두 시간이면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수화의 글은 그 당시 섬사람들을 정기적으로 육지로 실어 나르는 정기여객선이 아니고 부정기적으로 다녔을 똑딱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수화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장래 유명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부유했던 집안 어른들은 아들이 커서 가난뱅이 환쟁이가 되겠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화는 매일 마을 앞 바닷가 갯바위에 나와서 어떻게 하면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궁리만 하며 있었는데, 어느 날 마을 앞 ‘압내리’ 바닷가에서 목포항으로 항해해 가는 똑딱선 한 척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화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면서 발동선을 향해 손을 흔들어 태워주기를 간절히 요청했다. 다행이 인심 좋은 뱃사공을 만나게 된 수화는 무사히 목포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는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떠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친구한데서 들은 적이 있다.
수화가 섬 고향을 벗어날 수 있게 태워준 그 배는 흑산도 큰 바다 어느 곳에서 고기를 많이 잡아 만선의 기쁨을 안고 목포항으로 귀항 중에 있었던 똑딱선이었을지 모른다.
1950년대 후반 내가 중학생시절 목포항에서 정기여객선을 타고 시하바다를 건너서 내 고향 ‘진번선착장’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때 수화가 타고 갔을 똑딱선 속도보다 더 빠른 1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나 개학하려고 아침 일찍이 고향 집을 나와 1시간동안 걸어서 ‘진번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오전 배’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그 전날 오후 2시에 목포항을 출항한 ‘오후 배’는 ‘안좌도’ ‘팔금도’를 거쳐서 마지막으로 종착한 ‘암태도’선착장에 정박해 하룻밤을 세우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항해 ‘진번선착장’으로 들어오는 길목 섬 모퉁이를 돌면서 긴 뱃고동을 울려 가까이에 오고 있음을 알린다.
선착장으로 들어오는 여객선에서 일구어낸 세찬 물결이 너울져 갯가로 밀려와 갯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이루다가 다시 뒤돌아 바다로 밀려나가기를 반복 한다.
여객선은 부둣가 바다 밑이 너무 낮아서 더 이상 부두 가까이 근접하지 못하고 저만치에 떠서 머물러 있다.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선(나룻배)이 노를 저어 마중을 나가 여객선 옆에 갖다 붙이면 승객들은 천천히 선상으로 오른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시하바다를 항해해 가는 여객선 옆으로 고기잡이 똑딱선 한 척이 만국기를 펄럭이며 만선의 기쁨을 가득 싣고 유유자적 지나가다가 여객선과 경주라도 한 번 해보자는 듯, 좁은 연통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통통’소리도 요란하게 전속력으로 뒤를 따라보지만 결국 힘이 부쳐선지 점점 뒤처지고 말았다.
엊저녁 해질 무렵에 어느 섬 마을을 떠났을까? 갑판 위까지 짐을 가득 실은 풍선 한 척이 저편 바다에 떠있는 고적한 섬 그늘 속에 돛을 모두 내린 채 호젓이 떠있다. 큰 돛대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두 날개를 천천히 휘적거려 날고, 하얀 바지저고리 한복으로 갖춰 입은 뱃사공이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세월아 네월아’ ‘삐그극 삐그극’ 노를 저어보지만 풍선(목선)의 진행 속도는 진전이 없어 보인다.
시하바다를 빙 둘러 떠있는 이 섬 저 섬에서 물길 따라 빠져나온 풍선들이 먼 곳 가까운 곳에서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비금도, 도초도, 자은도, 암태도에서 어젯밤 늦게 출항한 풍선은 여객선이 옆으로 다가가자 힘찬 물결에 크게 롤링 한다.
내가 탄 여객선은 지금 시하바다 한 가운데 홀로 떠있는 ’시하도’ 옆을 항해하고 있다. 바다 우측으로 잿빛의 돛에 바람을 충만하게 품어 안고 서둘러 떠오는 저 풍선들은 아마 ‘장산도’, ‘하의도’의 어느 갯마을에서 어제 새벽녘에 출항했을 런지 모르것다. 시하바다 북쪽 방면에 떠있는 ‘임자도’, ‘지도’의 어느 선착장을 출항한 풍선도 이 바다에서 조우하게 된다.
넓은 시하바다의 멀고 가까운 곳에는 고고하고 청순한 한 마리 학처럼 날씬하고 순박한 풍선들이 잔잔한 물결 위를 다소곳이 떠가고 있다. 저쪽 바다 한편에선 상괭이란 놈이 바닷물 속에서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검은 등을 보인가 싶더니 자맥질해 물속으로 살아졌고, 잠시 후 또 한 놈이 등을 보이면서 유영하다가 물결 위로 머리를 솟구치더니, 눈 깜박한 사이에 다시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흔적도 없다.
시하바다에 거센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파도는 성깔을 부린 나머지 뒤집어지고 거칠어져 풍선 따위는 항해할 수도 없었지만, 적당히 불어주는 날에는 갑판 위 3개 돛에 포만한 바람 가득 싣고 넘실대는 물결위에 한쪽 뱃전을 비슷하게 기울어서 물 찬 제비처럼 날아 질풍노도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향해 나아간다.
지금 나주 영산강에 가면 목선 선체에 붉은 황토색을 칠하고 돛대 하나 세우고, 돛대에는 누런색 돛을 매달아서 올리고 모터로 운행하는 목선이 떠있다. 나주시에서 “영산강 황포돛배를 재현했다.” 호들갑을 떠는 바로 그 배다. 그러나 그 배는 재질만 나무일뿐 내 오랜 기억 속에 간직된 풍선의 잔상과 ‘비슷하게나마 조금 닮았구나.’라고 생각할만한 곳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내 기억 속, 목선(풍선)의 잔영은 선체도 돛대에 올려쳐진 돛도 모두 회색으로 연상되는데 붉은 황토색깔 칠해 놓고 ‘황포돛배’라고 한다. 그 ‘황토돛배’라는 칭호는 60년대 어느 여가수가 불러 크게 유행시켰던 유행가 가사 ‘황포돛대’의 그 ‘황포’ 어휘 때문이 아닐 런지?
내가 ‘풍선’이라 부르기에 더 익숙하고 친근한 목선(木船)은 밀려오는 파도에 삐거덕거렸고, 비바람에 찢어진 돛은 바느질로 누덕누덕 기워졌고, 선체는 모진 풍랑과 바닷물에 씻기어 흐릿한 잿빛으로 변색된 초라한 모습 그 자체였다.
목선 중에 제일 작고 돛대가 없어 노를 저어야만 앞으로 나가는 나룻배라고 부르기도 하는 종선이 있는데 이 종선은 선착장으로 여객선이 들어오면 승객과 화물을 싣고 그곳까지 나가서 여객선에 옮겨 태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동양화 그림에 자주 등장한 돛대가 하나뿐인 목선은 아마도 낚시를 하는 배였거나 주낙배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 우리고향에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목선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런 목선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 등장한 낚시질도 하고 뱃놀이도 하면서 풍류를 즐겼을 그런 배가 아니었을까? 목선 중에 쌍돛대가 세워진 중간 크기의 돛단배가 있는데, 그 배는 물품을 싣고 이 섬마을에서 저 섬마을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선 종류의 목선이 많았다.
그 상품들은 옹기 종류와 젓갈류가 대부분이었는데, 옹기항아리와 독 종류는 가까운 강진 도요에서 싣고 왔을 것이다. 젓갈 종류로는 새우젓, 멸치젓, 깡달이(강달어, 황석어)젓, 송어젓(밴댕이젓) 등등이 있었는데, “새우젓은 전장포, 멸치젓은 추자도, 황석어젓은 법성포에서 싣고 왔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까지 ‘송어 젓’에 대한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다.
송어는 민물고기인데 어떻게 송어로 젓갈을 담았을까? 바다 송어 종류도 있어서 산란기가 되면 강으로 올라온다는 자료가 있어 알았지만 그 실태를 직접 본 적은 없다. 얼마 전, 고향 후배와 대화하던 중 ‘송어 젓’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송어 젓이라고 부르는 젓갈은 곧 밴댕이젓이고, 왜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도 고향에서는 밴댕이젓을 ‘송어 젓’이라고 부른다.” 한다.
‘육젓’이라고 부르는 새우젓은 양념을 해서 젓갈 그대로 먹는 가정이 많지만, 멸치젓은 삭혀서 액젓으로 만들어 김치 담을 때나 음식을 만들 때 양념으로 사용하고, 황석어젓은 전라도지방에서 김장용으로 사용하는 가정이 많이 있었지만 대중화되지는 못한 것 같다.
멸치액젓 재료로 사용하는 큰 멸치를 젓갈로 담아 어느 정도 삭혀지면 칼이 아닌 손으로 찢어서 따뜻한 밥에 얹어 먹으면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황석어젓과 밴댕이젓은 특히 봄철 모내기하는 날, 논둑에 줄줄이 길게 앉아서 점심 식사하는 일꾼들 사이에 끼어서 밥 먹을 때, 부족한 접시를 대신해 감나무에서 따온 잎사귀에 담아놓은 젓갈을 어머니가 직접 손으로 찢어서 내 숟가락 밥 위에 올려주셨던 그 아련한 추억은 두고두고 잊어지지 않는 어머니의 손맛이다.
이런 물품의 대금 결제는 현금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곡물로 지불하는 물물교환 방식 거래였다. 마지막으로 돛대 세 개를 세우고 다니는 큰 목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섬 아이들이 하굣길에 바다에 떠가는 풍선을 보면 “야! 저 배는 돛대가 둘이다! 셋이다!” 소리 지르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손뼉을 치며 반색 한다.
여름 보리농사철이 모두 다 끝나 타작한 보리가 집안의 곡간마다 가득 찬다. 정보매체라고 무엇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던 시절, 목포의 곡물시세에 대한 정보는 인편으로만 전달될 뿐이었다. “곡물시세가 좋다”는 연락을 받으면 보리 출하 날을 정하고, 마을의 단골 풍선 선주한데 연락을 하면 뱃사공은 마을 앞바다가 만조 때까지 보리를 싣고 나갈 풍선을 아랫마을 ‘전진리’ 원둑 수문 옆으로 정박시킨다.
풍선은 저녁때 저 먼 바다로 빠져나가는 썰물을 따라 출항하게 되어 있어, 보리가마니를 묶어 그 시간까지 실어내려고 온 동네가 법석이다. 우리 동네는 60~70호가 모여 사는 큰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저울은 하나밖에 없어, 지금 누구네 집에서 사용하고 있는지? 수소문해 찾아다니는 일도 내 임무 중 하나였다.
보리가마니를 묶어서 저울에 달고, 입에 물 한 모금 머금어 보리가마니에 ‘푸~’ 물을 뿌려서 촉촉해진 가마니 겉면에 먹(붓글씨 쓰는)으로 비표를 한다. 보리를 담을 빈 가마니는 목포에 나가서 사오기도 하지만 집에서 가마니기계로 직접 짜기도 한다. 보리가마니는 아무렇게나 묶는 것이 아니고 방식이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밧진머리(전진리)‘ 원둑에 정박한 풍선으로 보리가마니를 지게에 저어 나른다. 보리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마을 논둑길을 줄줄이 내러가는 모습이 마치 등에 무거운 짐을 싣고 한 줄로 서서 사막의 언덕을 걸어가고 있는 낙타 무리 행렬에 비유되었다.
원둑과 정박된 목선 난간의 조금 벌어진 간격을 널판으로 걸쳐서 징검다리를 만들어 받쳐놓고, 바닷물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위험스럽기도 하지만 곡예 하듯 건너서 배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싣는다. 보리가마니를 가득 실은 풍선은 그 무게가 무거워 배 난간까지 바닷물에 젖어 첨벙거리지만 선원들은 예사롭지도 않는 모양이다.
원둑 높이가까이 출렁이던 바닷물이 어느 틈에 썰물이 되어 저 멀리 빠져나갈 즈음, 선원들은 닻을 걷어 올리고 돛을 돛대 꼭대기까지 치켜 올리고 출항을 시도한다. 뱃사공은 한손으로 키를 잡아 배가 앞으로 향하도록 조종을 하고, 한손은 들어 원둑에 아직까지 남아서 쳐다보고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주기만 하면 풍선은 순풍에 돛 단 듯,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 사이를 빠져나와 시하바다로 향한다. 바람을 잘 탄 풍선은 말 그대로 쏜살같은 항해지만, 바람이 없는 날 항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정박하듯 쓸쓸히 서서 사공의 애만 태운다.
밤 썰물 때 출항한 풍선은 밤새도록 시아바다를 바로질러 새벽녘에 목포 선창가에 도착한다. 그 시절 보리가마니를 실은 사람들 중에는 그 풍선을 타고 목포에 다니기도 했었다 하는데 내 기억에 그런 경우를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 “바람 없는 날은 밤새도록 시하바다 한가운데에 떠서, 오도 가도 못하고 목선 위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경험담을 들은 적은 있다.
목포 선창가!
해남, 진도, 완도에서 나들이한 풍선까지 합세해 촌치의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찬 선창가에, 밀려와 출렁거리는 파도는 정박된 풍선들을 흔들어 돛대끼리 서로 부딪치게 해, ‘따닥따닥’ 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곤 했다.
풍선(목선)이 부두에 도착하면 때 묻은 보자기를 어께에 두른 하역꾼들이 어디선가 먼저 나타나고, 어느 틈에 지게꾼들까지 나와서 서성인다.
방울소리 짤랑거리는 짐마차도 짐을 가득 실어 나르는 선창가는 왁자지껄 요란스러웠고 활기에 넘쳤다.
지금은 식당가와 마트가 모두 차지한 그 자리는 옛날 곡물상회와 고기잡이 어구들을 파는 상회가 즐비했었지.....
“신안 섬사람들이 목포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말도 그 시절에 생긴 이야기였고 ........
단골 곡물상회에 옮겨진 보리가마니는 저울에 달아서 그날의 시세대로 가격이 매겨진다. 곡물상회에서 보리대금을 현금으로 받으신 아버지께서는 목포 남교동시장으로 가서 어머니가 부탁하신 생활필수품과 누나가 부탁한 곤실(수실)과 자식들에게 추석 명절에 입힐 옷가지도 사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두 계신 우리 집은 대가족이어서 식솔들이 오랜만에 배불리 먹으려면 돼지고기도 여러 근 끊어야 했다.
그 풍선에는 목포로 유학 온 자식들 하숙비로 갖다 줄 쌀자루(당시에 하숙비는 쌀로 주었는데, 대두 2말인가? 1.5말인가?)가 실어져 있어서 지게꾼으로 하여금 하숙집까지 져다주게 했었고, 자취하는 자식의 경우는 식량과 부식 그리고 땔감까지도 풍선을 실어 와야 했다.
낮 시간이 짧아진 겨울철 찬바람이 가슴팍으로 으스스 스며드는 하굣길, 읍동리 고갯길에 오르면 눈 아래로 저 멀리 펼쳐진 바다물결 위에 저녁노을 황금의 빛줄기가 길게 내리비추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던 석양이 노을 진 바다 위에 고요히 떠있는 풍선의 가장 높은 가운데 돛대에 걸쳐져, 점점 황금빛깔로 젖어드는 저녁노을 풍경을 더 한층 아름답게 한다.
저녁바다 잔잔한 물결 위에 겨울철새 고니 때가 날아와 꽃노을 속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려는 듯 아늑한 보금자리를 찾고 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잔잔한 파도는 바다 깊이 스며들고, 님 떠나보내고 눈물짓는 새아씨 옷자락이 아롱거리는 부둣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 한데 애달프던 정조(情調)는 어디에서 찾나?
유달산 넘어 불어오는 시하바다 바닷바람은 영산강둑에 막혀지고, 님 그리워 우는 심정은 깊은 밤 조각달 흐르듯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기억은 바로 어제 일인 냥, 생생하당가?
풍선이 떠나가 버린 옛 항구에 홀로서서 그리움에 젖는데, 흔적도 없이 아득하게 멀어져버린 지난 세월은 어디에서 찾는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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