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 2015. 06. 27(토)
▣ 기상상황 : 흐림
▣ 산행장소 : 영산기맥 6구간(한우재~상광암고개)
▣ 주요봉우리 : 구봉산(249m)
▣ 행정구역 : 전남 영광군, 함평군
▣ 산행인원 : 영산기맥팀 10명
▣ 산행코스 : 광암저수지→용천사주차장 갈림길→한우재(고285)(우)→고275(우)→고270(좌)→좌 꺽임→조릿대↑,소나무 ,잡목→조릿대↓→고235(우),군사시설 말뚝→말뚝(공-024)(좌)→경고문-(우)↓→안부4거리(고140),불발탄 지역 경고문→참호봉(고145)-잡목→좌 꺽임,주의→문관석→화산골재(고90)-사격훈련 교육장→공격 개시선→고175(우)→좌 꺽임→고190(좌)→고215(우)↓→고140(우)→지경재(고75),23번 국도→지경재(고75),23번 국도→咸平牟氏世葬碑(함평 모씨 세장 비)→좌 꺽임,인삼밭→서해안고속도로 절개지-(좌),잡목,절개지↓→서해안고속도로 굴다리(우)→서해안고속도로-임도 버리고 절개지↑→묘지-묘지--잡목→묘 3기,복분자 밭→구봉고개,개농장-밭→고220(좌),비닐→고230→고250(우)→고240,우 꺽임→고215(좌),구덩이→임도3거리-임도따라서→송림고개(고150)→상광암고개(고130),송림정류장,17번 군도
▣ 산행거리 : 12.6km(Gps 측정거리)
▣ 누적거리 : 103.9km
▣ 산행시간 : 6시간 30분(휴식시간 1시간 35분 포함)
▣ 이동수단 : 자가용 2대(상광암고개에서 택시를 이용하여 차량회수)
▣ 산행후기
여름철이고 날씨가 무더워 시원한 시간에 산행을 시작할려고 아침 일찍부터 출발해 들머리인 용천사에 도착하였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살펴보니 이번 구간은 어느 구간보다도 가시잡목이 많아 고생도 많이하고 어려운 구간이라고해서 걱정을 많이 하고 갔는데 그렇게 어려운 구간은 없었다.
그리고 날씨도 비가 온 후라서 흐려 햇볕이 나지 않아 아주 좋았다. 따라서 예상시간보다도 빨리 산행이 끝나고 말았다. 이런것을 두고 싱겁다고해야 하나? 아무튼 기맥산행을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목적 달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성취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날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어느 누군가가 써 놓은 기맥산행이 좋은이유 6가지를 읽어보니 어쩌면 이렇게도 내 마음과 똑같은 말을 해놓았던지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혼자 보기엔 아까워 그 6섯가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낯선 길을 헤메는 즐거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중에, 여유가 있을때 나타나는 탐색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지맥 산행은 보통은 평범하지만, 때로는 그 자리에서 멍청히 굳어버릴 정도의, 아주 황홀한 경치를 만날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산행 코스 짧게 잡으면 편안하지만, 탈출로가 없는 긴 코스일 때는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사람들이 잘 안가는 장소를 다니다 보면, 산행외의 황당하고도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할 수가 있다. 가보지 않고는 알수가 없는 것이, 지맥 산행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2. 호젓함과 여유로움
아무리 좋은 명산도, 너무 많은 사람에 치이면 아름답지가 않다. 지맥은 하루 종일 걸어도 몇명을 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산행시간 동안, 호젓함과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3. 적절한 긴장감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관계로 긴장을 풀면, 다른 길로 들어서기가 쉬우므로, 항상 최소한의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심한 경우는 등산용 GPS를 가지고도, 하루에 몇번씩을 엉터리 길로 갔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물론 지맥에서 너무 많이 떨어지면, 바로 하산을 하는 경우도 많다.
4. 내 주변에서 가까움
e산경표에서 찾아보면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지맥이 많이 있다. 도시 주변의 지맥은 대부분이 고도가 낮고 산행이 어렵지 않아,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지맥과 1대간 9정맥
다음에는 어느 산을 가야하느냐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내 주변의 지맥만 해도 엄청나게 많다. 일주일에 한번씩 산행을 한다고 치면, 내 주변의 지맥 산행만 해도 10년은 더 걸린다. 그래서 재미를 붙이면, 주변에서 가까운 1대간 9정맥과 기맥을 찾아 산행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다. 이때쯤 되면, 명산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내 자신이 정말로 산과 가깝다고 느껴진다.
6. 봄, 여름, 가을과 겨울
봄에는 진달래부터 시작하여 마음껏 꽃구경을 하고, 조금 지나면, 각종 봄나물을 취할 수 있다. 여름이 되면, 지맥에서 일부러 탈출하여, 계곡을 찾아 몸을 식히는 것도 아주 별미이다. 가을이 오면, 사람 손이 닫지 않는 곳의 이쁜 단풍을 마음껏 구경하면서, 길가의 열매도 취할수 있다. 기다리던 겨울이 되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지겹도록 걸을 수가 있다. 물론 아주 추울 수도 있으나, 그 눈속의 황홀함은 정말 멋지다.
이렇듯 지맥 산행을 시작해 볼려면
1. 계획, 출발, 산행, 집으로, 결과 정리
전혀 모르는 길이므로 계획부터 세워야 한다. PC용 e산경표를 사용하면, 계획은 간단히 세울 수 있다. 산행시에는 휴대폰용 e산경표를 가지고, 궤적을 저장하면 길을 헤메는 불편을 덜 수 있다. 산행후, 결과 정리는 PC용 e산경표를 사용하면, 산행시 궁금한 길들을 알 수가 있고, 궤적을 그림파일로 저장 할 수도 있다.
2. 남은 것과 산행 출발
도대체 눈 앞에 어떤 상황과 경치가 나타날 줄을 가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정말 아름다운 자연과 세상 사는 많은 별의별 재미있는 경험과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가 있다.
이제 계획을 세우고, 간단한 산행 준비를 해서 훌쩍 떠나면 된다. 지맥 산행에서 가장 피곤한 것은 산행 후에, 저 산 반대편에 있는 차 회수이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지나가는 남의 차를 얻어타는 것이 일반적이나, 별의별 경우의 수가 다 생긴다. 그것도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하산 후의 차 회수는 어떻게든 해결이 되니 걱정말고, 지맥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오늘 우리도 상광암고개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용천사에 주차해둔 승용차를 회수하였다. 거금 15,000원을 주고서 말이다. 그래도 함께하는 동반자들이 있어 행복한 여정이었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 산행들머리인 함평 용천사
▲ 산행시작
▲ 한우재
▲ 등로에 풀이 우거져 있으나 상태는 양호
▲ 선답자들의 표시기가 있어 알바염려 없었음
▲ 지도를 보면서 갈 방향을 찾고 있는 중
▲ 갈림길마다 붙여져있는 리본
▲ 화신골재
이곳에서 막걸리를 한잔씩하며 잠시 휴식
▲ 군부대시설이 있는 곳이라 등로가 좋았음
▲ 인삼밭을 지나서 이어지는 등로
▲ 지경재
이 곳에서 등로를 따라가지않고
김철선생기념관을 구경하고
구봉고개로 오르기로 함
▲ 서해안고속도로 굴다리 통과
▲ 김철기념관
◎ 일강 김철 기념관 (一江 金澈 紀念館, The Kim Chul Museum & Library)
1.요약
일강 김철선생의 독립투쟁 사상과 조국 사랑, 민족 사랑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 구봉마을에 건립한 기념관이다.
2.설립년도 : 2003. 6. 30.
3.위 치 :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번지 일원
4.규 모
ㅇ대지면적 : 3,258평 (10,770㎡)
ㅇ건 물 : 4동 90평 (298㎡)
(사당10, 기념관30, 생활관30, 관리사20, 동상1기)
ㅇ구 조 : 목조 / 한식기와
ㅇ총사업비 : 2,170백만원
5.조성경위
일강 김철은 1886년10월 15일 출생하여 1915년 명치대학법학부졸업후, 일제통치하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1917년 상해로 망명하여, 1918.8.20. 중국상해 프랑스조계 백미로 25호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조동호,선우혁,한진교등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다.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신익희(申益熙) 신석우(申錫雨), 조동호(趙東祜), 신규식(申圭植),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시 보창로 불란서 조계내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상해대한민국임시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동년 4월 10일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전라도 대표)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재무위원겸 법무위원),교통부차장,교통부총장대리,군무부장,재무부장,의정원자격심사위원,회계검사원장,무임소장,국무원비서장 등을 지냈다.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일경의 추격이 급박해지자 친지인 피치목사의 집 2층에 김구선생 등과 같이 피신해 있다가, 동지들이 일경에 체포되는 등 임정을 떠나고 소수인원만이 같은해 5월초순경 항주로 임시정부를 이동하여 선생의 숙소인 항주시 청태2여사(현주소:人和路 22호) 32호실에 임시정부판공처를 설치하여 이동녕, 김구, 조소앙, 조완구, 안공근, 김석, 엄항섭 등과 같이 독립운동을 계속하며 평생을 오로지 조국 광복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헌신하다가 1934년6월 29일 순국하였다.
그후 해방된지 반세기가 지나는동안 이역만리 이국땅 중국에서 떠돌던 혼백을 운명한지 60년만에 후손들에 의해 숭모비 아래 안장 되었다. 이에 함평군과 후생들은 선생의 애국정신과 민족사랑 정신을 오래도록 기리면서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코자 기념관을 조성하였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선생의 동상
독립운동가 김철
김철(金澈,1886.10.15 ~ 1934.6.29)
한국의 독립운동가
1. 일생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에서 부친 김동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3남으로 출생하였다. 1908년 영광에 있는 광흥중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고,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17년 2월 나라를 잃은 설음에 분노하여 중국상해로 망명하였다. 1918.8.20. 중국상해 프랑스조계 백미로 25호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조동호,선우혁,한진교등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다.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하였다.
1918년 11월 중국상해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어 만찬회석상에서 여운형, 김철, 장덕수, 신국권등이 만나서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의견을 교환하고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여운형,김철,김규식 등이 협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각국에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국내에 밀입국하여 자신의 전답을 정리하여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하여 상해로 가져가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동년 2월 서울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 3만원의 독립자금 지원을 약속과 3.1만세운동 거사를 계획하고 상해로 건너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신익희(申益熙), 신석우(申錫雨), 조동호(趙東祜), 신규식(申圭植),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시 보창로 불란서 조계내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19년 4월 10일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되었고,같은 달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같은해 8월에 임시정부 교통부차장에 임명되었는데, 총장 문창범이 취임하지 않아 총장직까지 겸하게 되었다.1920년 1월에 그는 김구 등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발기해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의용단 산하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 안창호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하였다.
그러던중 임시의정원과는 별도로 안창호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결과 양자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급기야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가 만들어 지고 김철은 시사책진회 회원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간의 갈등 조정에 기여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12월 김구(국무령)내각 국무위원에 임명되었고,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 군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12월 새 헌법에 의하여 임기가 만료 제2차 내각구성에서 군무부장에 재임명되었고,1931년 10월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교민단(僑民團)심판이 되어 상해교민의 복지향상에 전념하였다. 같은해 11월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소앙과 중국인 오징천,서천방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1932년 1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같은 해 11월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동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중국 홍구공원에서의 백천대장 등 일본인 폭살 양대 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일경의 추격이 급박해지자 상해에 있는그의 친지인 피치목사의 집 2층에 백범,안공근,엄항섭 등과 같이 피신해 있었다.
같은해 5월 초순경 상해임시정부를 항주로 이동하여 선생의 숙소인 항주시 소재 청태(淸泰)제2여사(第二旅社)32호실에 임시정부판공처(臨時政府判公處)를 설치하여 임시정부 항주시대를 개막하였다. 동년 5월 16일 항주에서 첫 국무회의에서 선생은 재무장 에 김구선생은 군무장에 임명되었다.
1933년 7월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되어 자격심사위원으로 신도의원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1934년 1월 3일 제3차내각(주석 양기탁) 무임소장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4월 2일 국무원비서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이동에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며 몸받쳐서 기력이 다 할 때까지 분골쇄신하였다. 한때 김구와 맞선 조소앙(趙素昻)과 제휴하였다. 한국독립당 14인 이사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바 있다.
1934년 6월 29일 중국 항주(杭州)소재 광자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려 몸이 쇠진하여 급성폐염으로 순국하였다. 이시영, 조완구, 송병조, 양기탁 등 임정요인들의 애도속에 악비묘(岳飛廟) 뒷산에 안장되었다. 최혜순(崔惠淳)여사와 사이에 미경, 혜경 등 두딸을 남겨 두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김철기념관을 구경하고 구봉고개로 향함
▲ 복분자
▲ 구봉고개
▲ 시원지삼거리
▲ 구봉산 정상에서 인증샷하고 점심식사
▲ 산딸기를 따 먹는 모습
▲ 송림정류소
▲ 상광암고개
'등산&여행&맛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안 승달산(제일교회~목포대박물관) (0) | 2015.07.05 |
---|---|
무안 승달산(청계제일교회~승달산~목포대박물관) (0) | 2015.06.28 |
무안 남산~연징산~승달산 종주 (0) | 2015.06.20 |
무안 승달산(목포대~승달산~목포대) (0) | 2015.06.14 |
영암 월출산 기찬묏길(기찬랜드~기체육공원~기찬랜드) (0) | 2015.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