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진(木浦鎭)
목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어머니의 품처럼 변함없다. 그 만큼 다른 도시에 비해 발전의 더딤을 말해줌일까. 굳이 목포가 고향이 아니라도 ‘그 곳’을 떠올리면 낭만과 애수가 클로우즈업되어 센티멘털해지곤 한다. 그래서 목포를 ‘눈물의 도시’로 불리고 있는지 모른다.
목포의 탯자리가 묻혀있는 목포진(木浦鎭·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137호)은 북항을 지나 유달산 등구 쪽을 향해 5분여를 가다보면 초원관광호텔이 있다. 여기서 다시 제일성결교회를 끼고 좌회전해 오르막길로 들어서면 목포시 만호동 1의 56번지 앞 공터에 ‘목포진 유적비(木浦鎭遺蹟碑)’란 석비(石碑)가 서 있다. 아쉽게도 진(鎭)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외로이 서 있는 유적비에서 옛 목포진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 연혁 및 규모
목포진(木浦鎭)은 조선시대 수군(水軍)의 진영(鎭營)으로써 만호(萬戶 : 鎭의 우두머리)가 배치 되었다. 목포는 지리상으로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요충지에 있다. 이 때문에 호남과 경상 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 역할을 했다.
목포진이 설치된 배경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무안현(務安縣) 목포(木浦)와 보성현(寶城縣) 여도(呂島) 등은 모두 왜적이 드나드는 요해지(要害地)인데, 병선(兵船)을 정박하여 세운 곳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청하옵건대, 목포와 여도에 따로 병선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를 임명하여 보내소서.(세종 21년 4월 15일)” 이와 같이 목포(木浦)는 길목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돼 그 곳을 침략하는 왜적을 경계하기 위해 진(鎭) 설치가 재기 되었다. 성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그 보다 후대인 연산군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선상수어(船上守禦)’의 원칙에 따라 수군만호(水軍萬戶)는 항상 병선(兵船)을 이끌고 해상을 왕래하며 방어와 수색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해당 영(營)·진(鎭)에는 군량과 군기를 비축하고 있었다. 이후 선상 방어상의 어려움을 인정하여 1501년(연산군 7)께 성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목포진에는 만호(萬戶, 무관 종6품) 1인 외에 군관(軍官) 6인, 진무(鎭撫) 7인, 사부(射夫) 2인, 사령(使令) 5인의 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호는 인근 지역의 해상 경계 경비 등 병사 업무의 수행 이외에 진영 소재지의 일반 행정까지도 관할하였다. 한반도 서남해 방어지로서 그 역할을 다 했던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군사제도의 개편요구에 따라 목포 개항 2년 전인 1895년 7월 15일 칙령 제141호로 폐진됐다.
- 木浦鎭의 상징적 의미
목포진(木浦鎭)은 목포의 역사를 실증하는 최초의 장소이다. ‘목포’라는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07년(태종 7)이지만, 본격적으로 행정을 수행했던 시기는 진(鎭)이 설치된 1501년께로 추정된다. 1897년 10월 1일 개항 전까지 목포 역사의 제 1기라고 할 수 있는 500여 년 동안 군사 요해처(要害處) 기능을 수행했던 목포진은 이때 도시의 성격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개항 당시 목포진 청사 일부가 남아있어 무안감리서, 일본 영사관 또는 해관으로 임시 사용되었다. 목포라는 도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매우 부족한 것은 과거 500여 년 동안 행정의 중심이 아닌 관방 도시로서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 곳에 감리서가 설치됨으로써 실로 500여 년만에 목포가 행정의 중심도시로 변모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진지 주변은 그후 영국 영사관 기지로 편입 되었다가 한일 합방 이후 다시 민가로 전용되었다. 목포진 일대 성곽의 흔적은 옛 사진을 통해서나마 조금 살펴 볼 수 있는 정도이다.
한편, 목포진과 관련된 유적으로 두 개의 석비가 남아 있다. 당시 일본 영사관 뒷 뜰에 묻혀있던 것을 해방 이후 현 목포문화원 앞 비석 거리에 세워 놓았다.
목포진을 중심으로 왼쪽엔 부활의 몸부림을 치는 삼학도가 한 눈에 들어오고, 발 아랜 목포항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목포진 도로확장 공사 장면
그러나 도로가 너무 가파르고
차량통행이 어려울것 같다.
목포진전적비
목포시가 500여 년 전 축성되었던 목포진(목포 수군 만호진) 복원을 위한 준비단계가 한창이다.
시는 만호동 1-56번지 일원, 8,713㎡에 객사, 내삼문, 전통담장, 공원 등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시는 2007년 목포진 복원 및 역사공원조성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지역 내 토지 및 지장물에 대한 보상, 발굴조사, 학술심포지엄을 거쳤다.
올해 3월 착수보고회를 개최한데 이어, 객사 관련 문화재 전문가와의 협의를 마치고, 지난 9월에는 전라남도 문화재현상변경허가를 완료한데 이어, 전남도 공공디자인위원회 심의에 따른 도비지원(5억 원) 심의를 마쳤다.
목포진 진입로 개선공사는 기존 도로 폭이 2.5m로 공사차량 진입이 어려워 7m 폭으로 확장추진하고 있으며, 현재 공정률이 75%를 보이고 있다.
시는 일련의 행정절차를 차질 없이 마무리고 하고 10월 14일 목포진 공원계획수립 및 실시설계 용역 최종보고회를 실시했다.
이번 최종 용역보고회에서는 문화재 전문가의 자문, 문화재 전문설계업체에서 설계한 객사, 내삼문, 전통 담장 등의 설계안이 제시됐으며, 관람객 및 주민 편의를 위한 휴게시설 설계 등에 대한 보고회를 가졌다.
이에 따라 이번 최종 용역보고회를 마치고, 앞으로 목포시 도시공원위원회 심의, 건설기술심의회, 전라남도 계약심사 등을 마무리 짓고, 오는 11월까지는 공사 발주에 들어갈 방침이다.
시는 목포진을 복원하여 원도심의 근대문화유산과 관광자원을 연계하여 유달산, 근대문화유산, 삼학도를 잇는 주요관광 네트워크의 구심점으로 조성할 방침이다.
시민의 휴식공간과 외래 관광객의 탐방코스로 활용함은 물론, 이곳이 시장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풍부한 차별화된 관광자원으로 조성하여 원도심 활성화를 이루는 촉매제 역할지로 만든다는 것이다.
시 관계자는 “목포진 복원은 개항의 도시이자 항구도시인 목포가 500여년 이상 된 역사유적이 존재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주고 있다”며 “도시역사의 출발점이자 구심점인 이곳을 차별화된 관광자원으로 조성하여 원도심활성화를 이루는 통로 역할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목포진은 1439년 세종 21년 4월에 최초로 설치되어 당시 전라수영의 5개 만호진 중 하나였으며, 그 후 성종과 연산군 시대를 걸치면서 1501년에 목포만호진에 수군진성이 축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
목포진 복원공사를 할 터
항동시장으로 내려가는 길
김대중대통령이 옛날에 살았던 집이라고 하는데
허술하기 짝이 없고 금방 허물어질것 같다.
아무래도 복원은 불가능학서 같고
철거를 한 다음에 표지석을 세워쓰면 좋겠다.
김대중대통령이 기거하였다는 집을
전면에서 본 모습이다.
항동시장으로 가는 골목길
목포진을 복원할 때 이 골목길도
함께 말끔히 손을 보았으면 좋겠다.
목포진 입구에 만호동주민센터에서
벽화사업을 하였는데 인기가 매우좋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서 벽화사업을 하였으면 한다.
항동시장 아케이트공사 현장
항동시장 아케이트공사가 매우 많이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하루빨리 공사가 완공이 되어 항동시장 상인들의 편의를 증진시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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