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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완주 위봉산~되실봉~서래봉~오도봉~서방산~종남산 종주

 


어제 진도 동석산을 다녀온 여독이 아직 풀리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아내와 둘이 뚜벅이산악회를 따라 호남정맥 길인 위봉산, 서방산, 종남산 종주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늘 종주를 할 산들에 대한 개요를 보면 아래와 같다.

 

위봉산[威鳳山]은 높이 524m. 전주시 동부 외곽을 이루는 산지의 하나로 주위에 대부산(貸付山:602m)·원등산(遠登山:713m)·학동산(學洞山:458m) 등이 있다. 남쪽·서쪽은 완경사를 이루고, 급경사를 이루는 동쪽·북쪽에서 발원한 물은 사봉천을 이루어 동상저수지로 흘러든다. 예로부터 전주8경 또는 완산8경이라 불릴 만큼 경치가 빼어났으나 지금까지 옛 경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은 위봉폭포뿐이다.

 

남쪽 사면에 있는 높이 60m의 위봉폭포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쏟아지는 2단폭포로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폭포에서 북서쪽으로 약 0.5km 올라간 곳에 위치한 위봉사는 604년(백제 무왕 5)에 서암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그 경내에는 위봉사보광명전(威鳳寺普光明殿:보물 제608호)이 있다.

 

경사가 심한 도솔봉·장대봉 등의 봉우리를 에워싸고 위봉마을이 있는 위봉산성은 길이 16km, 폭 3m, 높이 4.5m로 1675년(조선 숙종 1)에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셔두기 위해 축성했다. 동문·서문·북문의 3문과 성내에는 행궁(行宮)과 진전(眞殿)의 터가 남아 있다.

 

서방산 / 종남산은 전북 완주에 자리잡은 서방정토 종남산(610m)과 서방산(671.7m) 줄기는 드넓은 김제 만경평야와 산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숲이 울창하고 암벽과 암릉이 제법 발달돼 있다. 울창한 숲 속을 흘러내리는 봉서사 골짜기의 개울도 맑고 수려해 평야에 가까우면서도 깊은 산중의 맛이 느껴져 이 지역 산꾼들로부터 사랑받는 산이다.

특히 뛰어난 것은 조망이 좋다는 것. 평야와 산지의 경계에 있어 넓은 김제 만경들을 넘어 서해 바다를 볼 수 있고 북에서 동을 거쳐 남으로도 수많은 산들을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송광사나 봉서사 등 유서깊은 사찰을 산행들머리로 하는 덕분에 산자락의 문화재를 감상하기도 좋다. '남쪽의 끝에 있는 명산' 이란 뜻의 종남산은 가지산파의 시조인 도의선사가 중국에서 수행한 종남산과 모습이 비슷하여 그리 붙였다는 설이 있다.

종남산은 도의선사와 인연이 깊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도의선사가 북으로부터 절터를 찾아 내려오다 종남산에서 영천수가 셈솟는 것을 발견하고 더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터를 잡았으니 이곳이 바로 송광사터이다. 

 

산행지도

 

◈ 산행일시 : 2012. 10. 07(일)

산행장소 : 위봉산, 되실봉, 서래봉, 오두봉, 서방산, 종남산

행정구역 : 전라북도 완주군

산행인원 : 아내와 둘이 목포뚜벅이산악회 따라서

산행코스 : 위봉사입구~위봉폭포~위봉산(장대봉)~위봉산성~되실봉~억뱅이재~서래봉~오도치~오도봉~서방산~세남은재~종남산~송광사(약 16.0km)

산행시간 : 6시간 50분(09:50 ~ 16:40) 소요 - 휴식 및 점심시간 포함

주변관광 : 송광사

날      씨 : 얕은 안개 그리고 무더운 날씨

이동수단 : 45인승 대형버스

소요비용 : 50,000원 

산행후기

▲ 호남정맥길인 오늘 연계산행은 산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오르고 내리는 길이 험하여 너무나도 힘든 산행이었다.

또 날씨가 무더워 물이 떨어져 애를 먹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모처럼 장거리 산행을 종주했다는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그리고 하산하여서는 송광사를 구경하였는데 그 규모가 대단히 컸다.

 

산행사진

위봉사입구에서 하차하여 위봉터널을 지나 위봉폭포로 향하는 모습

 

 

위봉폭포

 

위봉폭포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위봉마을 즉 위봉산성의 동문쪽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가 60m이며, 2단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옛부터 완산 8경에 드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폭포 주변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가까운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을 기념하는

웅치전적지(전라북도기념물 제25호)와 종남산기슭에 송광사가 있고

하류에는 동상저수지, 대 아저수지, 화심온천이 있다.   

 

위봉폭포를 구경하고 다시 위봉사쪽으로 되돌아와

오늘의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위봉산갈림길

 

이곳에서 위봉산을 갔다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위봉산(장대봉) 

 

위봉산에 있는 삼각점 

 

위봉산에서 인증샷 

 

  

되실봉으로 오르고 있는 모습

 

 

되실봉을 오르기전에 잠시 휴식

  

위봉산성

 

⊙ 지 정 별 : 전라북도 기념물 제 17호

⊙ 소 재 지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산

 

위봉산성에 대한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전주동방 40리에 있는 데 석축으로 둘레는 5천 97파(把)이고 여첩(女堞)은 2천438이요 성안에는 45대의 우물이 있으며 물웅덩이는 9개소, 소금산 은 1개소가 있다. 숙종 원년(1675)에 쌓았다." 라고 쓰여 있다.

숙종대에 이곳에 산성을 새로 쌓은 것은 전주에서 가까운 곳에 험한 지형을 골라 새로이 성을 쌓아 유사시에 태조영정을 피난 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위봉산성의 주된 목적이었다.


산성 내에 행궁을 세웠는데 「완산지」에 행궁은 영정이안소(影幀移安所)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 위봉산성의 특징을 밝히고 있다.


갑오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했을 때 전라감사 김문현을 전주 부성을 방어하는 책임을 저 버리고 경기전 영정과 조경묘위판을 피난시킨다는 핑계로 받들고 와서 승려에게 맡겨놓고 공주로 도망친 일이 있었다.


위봉산성은 처음에는 연산군에 속했으나 1704년(숙종29년) 8월에는 김제군으로 속했다. 그 후 9개 고을이 여기에 속하여 각기 군기고(軍器庫)·군향고(軍餉庫)를 두게 하였다. 성안에는 위봉사가 있는 데, 행궁을 승도들이 수직한다 한 것처럼 평소의 수비를 위하여 산성안에 사찰을 짓는 예가 많다. 위봉사도 산성과 행궁을 지키기 위해 동시에 건물을 세운 것이다. 

 

  

되실봉 

 

  

  

  

  

  

  

  

서래봉

 

서래봉은 농기구 ‘써레’를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근방에서 가장 높이가 높은 주봉이지만 암릉의 화려함이나 조망에 있어선 계봉산이 더 탁월하다.   


서래봉에서 점심식사 

 

점심식사 후 잠시 나이별 호칭에 대하여 덕담을 나누고 있는 장면

 

***나이별 호칭***
  
2-3세 해제 (孩提)
어린아이  

 

15세 지학 (志學)  
15세가 되어야 학문에 뜻을 둔다는 뜻  

 

20세 약관 (弱冠)  
남자는 스무살에 관례를 치루어 성인이 된다는 뜻  

 

30세 이립 (而立)  
서른살 쯤에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뜻  

 

40세 불혹 (不惑)  
공자는 40세가 되어서야 세상일에 미혹함이 없었다는 데서 나온 말  

 

50세 지천명 (知天命)  
쉰살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뜻  

 

60세 이순 (耳順)  또는 육순 (六順)
논어에서 나온 말로 나이 예순에는생각하는 모든 것이 원만하여 무슨 일이든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뜻.  

 

61세 환갑 (還甲)  회갑 (回甲)
예순하나가 되는 해의 생일  

 

62세 진갑 (進甲)  
회갑 이듬해, 즉 62세가 되는 해의 생일  

 

70세 고희 (古稀)  
두보의 곡강시에서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 (人生七十古來稀)에서 유래된 말.  

 

71세 망팔(望八)  
팔십세를 바라본다는 뜻  

 

77세 희수 (喜壽)  
오래살아 기쁘다는 뜻. 喜자의 약자가 七자로 이루어져 77을 뜻함  

 

80세 산수 (傘壽)  
傘자가 八十을 의미함  

 

88세 미수 (米壽)  
여든 여덟살의 생일. 米자는 八十八의 합성어임  

 

99세 백수 (白壽)
百(100)에서 一을 빼면 99, 즉 白자가 됨  

 

100세 기이지수 (期臣頁之壽)  
사람의 수명은 100년을 1期로 하므로 기라하고, 이(臣頁)는 양(養)과 같은 뜻으로 곧 몸이 늙어 기거를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의탁한다는 뜻. 
 


가야할 서방산과 종남산의 모습  

 

  

  

 

  

  

  

  

  

  

  

  

 

 

 

 

 

 

 

 

 

 

 

 

 

 

 

오도치

 

오도봉을 향하여 오르는 모습

 

오도봉

 

 

 

 

 

서방산

 

서방산 정상의 헬기장

 

 

종남산

 

 

 

 

 

 

 

 

하산하고 있는 모습

 

날머리에 열린 감

 

하산하여 송광사로 향하고 있는 모습

 

 

 

 

 

 

 

 

 

 

 

 

 

 

 

 

 

 

 

 

송광사 관광

 

송광사는 도의선사가 절터를 찾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터를 잡았는데 그때가 신라 진평왕 5년(583)이었다. 그후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서 중창되었다.

 

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大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었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한지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덕림스님을 중창주로 모시고 복원·중창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에 전주사고(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하여 승군 700명이 머무르는 등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이다.

 

또한 석가의 화현이라고 하신 진묵스님께서 1623년(계해년) 대웅전 삼존불 조성시 증명법사로 초청되었으나 부여무량사에서도 동시 초청된 관계로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단주를 보내 법력을 나투었는데 주장자가 밤낮으로 꼿꼿이 서서 법상을 물리는 신의함을 나투신 곳이기도 하다.

 

일주문은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 밖인 나드리(무주, 진안방면 도로 입구)라는 곳에 서있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옮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절은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렸으며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방사가 즐비하여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 

 

 

 

 

소맥 몇잔을 하고 전어비빔밥으로 저녁식사

 

 송광사주차장을 떠나면서 바라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