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 시 : 2014. 7. 5(토)
▣ 날 씨 : 박 무
▣ 산행장소 : 금오산(976m)
▣ 위 치 : 경북 구미시
▣ 산행인원 : 토요산악회 따라서
▣ 산행코스 : 주차장~금오산저수지산책로~자연학습원~취영정~칼다봉(중식)~성안전위봉~성안대피소(금오정)~금오산 현월봉~약사암~마애보살입상~오형돌탑~할딱고개~대혜폭포~해운사~대혜문~매표소~채미정~주차장
▣ 산행거리 : 12.13km(Gps 측정)
▣ 소요시간 : 7시간 20분(09:30~16:50, 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 산행사진
금오산주차장
목포에서 05:10분에 출발하여
4시간을 달려 금오산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앞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아서 너무나도 좋다.
금오산안내도
칼다봉을 향하여 산행시작
계곡에서는 철철철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비가 온 뒤라서 수량이 더 많은것 같다.
금호산저수지
금오산장휴게소
금오산저수지산책로를 걷다가
칼다봉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산행시작
취영정
이 곳에서 칼다봉까지는 2.3km
절벽에 붙어잇는 멋진 소나무
칼다봉
칼다봉에서 점심식사
암릉구간
저 멀리 보이는 금오산 정상 현월봉
아름다운 소나무
웅장하게 보이는 금오산 정상 현월봉
지나온 칼다봉
금오산 정상 현월봉
송신소
금오산 정상은 지금 정비 사업중
금오산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면
약사봉 아래에 약사암이 있다.
약사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금오산(金烏山, 976m) 정상의 약사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으며, 1618년(광해군 10) 간행된 <일선지 一善誌>, 1799년(정조 23) 간행된 <범우고 梵宇攷>에 고찰(古刹)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 嶺南鎭誌>에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城內) 삼리(三里)에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약사암은 약사전·삼성각·일주문·종각·요사로 구성되어 있다. 1985년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건립한 약사전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약사암의 중심법당이다. 내부에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1935년 우상학이 지은 ‘약사암중수기’에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기 중 1기를 이곳 약사암으로, 나머지 2기를 수도산 수도암과 황악산 삼성암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쓰여 있다. 석조여래좌상 좌우로 일광·월광보살이 협시되어 있으며, 후불탱·신중탱·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요사채 왼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바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높이 5.5m의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관악산 연주암, 은해사 중암암과 더불어 한국의 3대 기암으로 알려져 있다.
산수국
바위틈에서 쏟아지는 약수로 목을 축이고
기도를 하는지 촛불이 켜져 있었다.
금오산 마애보살입상
금오산 마애보살입상(金烏山磨崖菩薩立像)은 보물 제490호로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24-1에 있다.
이 보살상은 암벽 모서리에 조각되어 있다.
상(像)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다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 코, 입 등도 원만상으로 처리되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며 목의 삼도(三道)는 명확하지만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인 것이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진 상가의와 그 아래로 내려진 “U”형의 상의(尙儀), 양팔에서 내려진 옷자락 등 모두 묵직하게 표현되고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두광, 신광 모두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신광은 보주형(寶珠形)을 이루고 있다.
대좌는 입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이 되게부각(浮刻)되어있다.
전체 높이는 5.55m, 몸높이는 4.175m, 대석이 5m의 크기이다.
입상 전면의 평평한 대지에는 현재 주초(柱礎)도 있고 기와조각들도 흩어져 있으며 암벽에도 목조가구 흔적이 보이므로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금오산 하산길에 약사암을 지나
마애보살 입석지를 내려오면 오형돌탑이 있다.
이 돌탑을 쌓는분이 현재 70세가 되셨다고 하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 이런일이" 방송에도 출연한적 있었고
가끔 금오산을 오를때마다 하나씩 둘씩
새로운 모습의 돌탑이 세워지곤 한답니다.
여기에 주목할만한것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않는
매우 위험한 장소에 세워지고 있으며
그 누구의 도움도 전혀 받지않으시며
다른 도구도없이 맨손으로 이루어 내신답니다.
이 돌은 주변의 작은돌들로 탑을 이루고 있는데
보기에도 아슬아슬 하지만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잘 견디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예술적 미가 베여있어 보는이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 오형돌탑이 이제 금오산의 자랑이자 명소로 점차 알려지고있으며
오래오래 보존하여 많은사람들이 보았으면 합니다.
할아버지 손자이름이 "형석" 이였고
금오산 "오"자 와 형석"형" 을따서 오형돌탑이라 합니다.
아래 우측에 오형돌탑이라 적혀있습니다.
이 돌탑의 사연은 손자의 애환 서린 이야기가 담겨있는 애절함이 베여있다고 합니다.
할아버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작은 한마음 기도드립니다.
할딱고개
할딱고개전망대
할딱고개전망대에서 바라본 금오산
대혜폭포와 욕담
금오산 정상 근처 산성 안에는 1595년경 임진왜란 당시 만들어진 아홉 개의 우물[九井]과 일곱 개의 못[七澤]이 있어 거기서 비롯된 큰 계곡을 대혜계곡이라 하였고, 그 곳에서 형성된 폭포를 대혜폭포라고 하였다. 또 그 물이 여울을 이루어 구미 지방의 용수 공급에 큰 혜택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대혜폭포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대혜폭포는 명금폭포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1935년쯤 경상북도 도지사인 일본 사람이 이곳을 찾아 주변 경관과 물소리에 매료되어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차가운 기운에 정신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사물은 희미한데, 쾅쾅 울리는 소리만 있어 ‘금오산을 울리는 소리’라고 탄복하고 자기의 시상(詩想)이 사라지기 전에 석수(石手)를 불러 암벽에 ‘명금폭(鳴金瀑)’이라 새겼다고 한다. 그 후로 바위에 새겨진 이름이 많은 등산객들에 의해 전해지면서 오늘날 명금폭포라고도 불리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계곡의 시원한 폭포
도선굴은 시간관계상 가보지 못하였다.
해운사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에 있는 일제강점기 사찰.
해운사(海雲寺)는 대혈사(大穴寺)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에 있었으나 폐사되었다가 1925년 승려 철화에 의해 복구되면서 사명을 해운사라 하였다.
해운사는 1925년 승려 철화에 의해 금오산성 안의 도선굴과 대혈사지 사이에 건립한 사찰이다. 이보다 아래쪽에 대혈사가 있었는데, 고려 후기 길재(吉再)가 이곳에 은거하여 손수 대나무를 심었고, 임진왜란 후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일선지(一善誌)』 「불우조」에 있다.
해운사 뒤쪽에 도선굴(道詵窟)이라는 석굴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인동(仁同)과 개령(開寧)의 백성 500~600명이 피난하여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해운사 건물은 1978년부터 1984년에 걸쳐 승려 성화에 의해 중수되었고 사찰 내에는 대웅전, 삼성각, 요사, 제하당(霽霞堂) 등이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흥정
지하168m의 암반층에서 솟아나는 맑고 시원한 양질의 지하수
대혜문
금오산성
<요약설명>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성으로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피란지로 이용되었던 대규모 산성이다. 고려 말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피해 인근 백성들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다고 하며, 조선 태종 10년(1410)에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방상의 요충지로 부각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는 외성을 쌓는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으며, 고종 5년(1868)에도 새로 고쳐 쌓았다고 한다.
내외 성벽의 총 길이는 6.3㎞이며, 금오산의 정상부에 테를 둘러쌓은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과 정상부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포곡식으로 쌓은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내성의 둘레는 약 4km이며, 험한 절벽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계곡을 둘러 싼 외성은 둘레가 약 2km이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계곡과 연못, 우물이 많았고, 대혜창과 내성창 등의 창고와 진남사(鎭南寺)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 외성의 문터,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성문인 암문의 형체, 그리고 각종 건물터 들이 남아 있다. 또 성 안 고종 5년(1868)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가 있다. 금오산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의 공격을 막아 경상도 일대를 수비한 중요한 산성이다.
<상세설명>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고려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을 두었다.
조선 태종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 외성을 쌓는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고종 5년(1868)에 새로 고쳐 쌓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1개의 계곡과 여러 개의 연못·우물이 있었으며,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 군기고, 진남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외성의 문터,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성문인 암문의 형체,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한편 성 안에는 고종 5년(1868)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가 성을 쓸쓸이 지키고 있다.
금오동학
돌탑21C
돌탑
작품명 가족
금오산성사적비
금오산케이블카 매표소
자연보호운동발상지
매표소
에어샤워룸
자연보호헌장탑
호텔 금오산 웨딩홀
채미정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에 있는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
[개설]
정자 이름은 길재가 고려가 망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한 것을 중국의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구미 채미정 뒤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절구(五言絶句)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과 유허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중앙 한 칸만 온돌방으로 꾸미고 방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또한 온돌방에 들어열개문을 설치하여 문만 열어 올리면 전체가 마루가 되도록 장치하였다. 건물 골격은 5량가에 겹처마집이다.
[현황]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에 자리 잡고 있다. 1977년에 전면적인 보수를 한 이후 현재는 잘 보존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채미정과 같은 평면구조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영남 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채미정 가는길
채미정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는 청춘남여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완료
금오산 산행 후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금오산로뎀식당에 들려
일행들이 하산하기를 기다리며 동동주로 뒷풀이를 하였다.
도토리묵 안주에 3잔하니 취기가 올라 왔다.
금오산 산행을 마치고 구미시 송정동에 있는 궁전탕으로 이동하여 목욕을 하였다.
그런데 목욕비가 3,000으로 절반정도 쌌다.
주인에게 왜 이렇게 싸냐고 물어 보았더니 살며시 웃으시면서 자주 오시라고 싸게 해 준다고 한다.
금오산 산행을 마치고 목욕을 한 후 바로 인근 금오산맥 식당으로 이동하여 돌솥비빔밥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삶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년마다 정기적으로 받는 건강검진 (0) | 2014.07.18 |
|---|---|
| 곡성 동악산(오토캠핑장~동악산~청류동계곡) (0) | 2014.07.12 |
| 지리산 대소골~심원능선 (0) | 2014.06.29 |
| 식당에서 치른 장모님 생신 (0) | 2014.06.28 |
| 목포 입암산(갓바위~입암산~갓바위) (0) | 2014.06.22 |